(196억 달러를 보유한 세계 26대 부호, 사우디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
아직까지 여성들의 운전이 금지되어 있는 사우디에서 이러한 족쇄를 풀기 위한 움직임이 그 어느때보다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성들에게 운전을 허용한다는 것이 단순한 조치가 아닌, 점진적으로 확대되어가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본격화하는 것이기에 바깥 일은 남성들의 몫이라는 인식이 강한 아랍 사회, 특히 사우디에서는 이를 오랫동안 금기시해왔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금기에도 불구하고 해외 체류를 통해 운전면허를 취득하는 여성들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도 현실입니다. 사우디에서만 운전을 못하고 사우디 밖으로 나가면 운전하고 다니는 것이죠. 이러한 현실을 반영한 듯 몇 년전만 해도 여성들의 운전을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며 논의 자체를 거부했던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슈라 위원회의 안건으로 상정하여 논의할 예정이기도 합니다. 예전같으면 여기까지 올라오는 것 자체를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지만요.
이러한 상황에서 사우디의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도 여성들의 운전금지 조치 해제를 지원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여성들의 운전허용이 왕국의 외국인 노동자 의존도를 낮추기 정책 중 용이하게 취할 수 있는 첫 단계라면서 말이죠.
사우디 취업비자 직종 중에는 "House Driver"라는 직종이 따로 있습니다. 일반 이까마 발급/갱신 비용이 650리얄인데 비해, 하우스 드라이버 이까마는 350리얄이면 됩니다. 운전자가 충분치 않아서 운전사를 고용해야 하는 개인가정들의 부담을 다소나마 줄여주기 위한 것이죠. 많은 사우디인들이 면허 취득 요건에도 해당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운전을 시작하게 되는 것고 결국은 아버지나 집안의 어르신이 없는 긴급상황에서 이동해야 할 때를 대비하기 위함인데, 이런 것조차 여의치 않은 가정에서는 외국에서 운전사를 데리고 옵니다. 식구들이 운전사의 부담없이 남성 보호자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서죠.
알 왈리드 빈 탈랄 왕자는 이러한 상황을 감안해서 여성들의 운전을 허용케 하면 약 75만명 정도로 추산되는 운전사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우디인 고용 및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의존도 감소 등이 정부의 최대 화두가 된 상황에서 이런 간단한 방법을 두고 왜 금지하려고만 드느냐는 것이 그의 주장인 셈이죠.
그의 주장이 사우디 정부의 선택에 큰 영향력을 줄 것 같진 않습니다만, 여성들의 운전 허용에 대한 사회의 공감도가 높아졌음을 반증하는 예가 아닐까 싶네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할 것으로 보는 것은 그가 사우드가나 사우드 왕실에서는 정치력이 없는 인사이기에 정책적인 결정에 관여하지는 못할테니까요.
경제적인 관점에서 여성들의 운전허용을 주장했던 것에서도 볼 수있듯, 그의 본질은 경제인이자 해외 투자자입니다. 포브스지가 선정한 올해의 세계 부호 26위에 이름을 올렸고, 로타나 비디오 오디오 비쥬얼 컴패니와 LBC SAT의 소유주이자 킹덤 홀딩 컴패니의 최대 주주, 시티그룹, 폭스뉴스, 레바논 신문 알 나하르와 알 디야르 등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사우디 최고의 투자가이기도 합니다. 시티그룹에 대한 성공적인 투자로 자금을 마련한 그는 타임지에 의해 "사우디의 워런 버핏"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으며 엔터테인먼트와 언론계쪽으로 그의 역할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그의 투자 원천에 대한 의문이 따라다니고 있는 가운데 최근에는 새로운 뉴스 채널 개국과 쿠웨이트의 이통업체인 자인의 인수설까지 나오며 광폭의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2009년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린바 있는데, 이는 현존하는 세계 최대 비행기인 에어버스사의 A380을 개인용 비행기로 질러버렸기 때문입니다. (내년에 물건을 받을 예정이라네요.)
그는 자신의 투자활동으로 취한 이득을 적정한 곳이 기부해 왔는데, 얼마전 기아자동차와의 협상 끝에 자신의 재단을 통해 기아차 1,000대를 지난 1월 26일에 있었던 젯다 물난리로 고생하고 있는 이재민들에게 기부하였습니다.
(젯다 이재민들에게 기부된 기아차)
이는 알 왈리드 빈 탈랄 재단에서 물난리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최선의 지원책이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한 연구 끝에 지난 달 에어컨 등 10,000여점의 필수 생활용품등을 협찬받아 기증한 이래 나온 일련의 조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기아차를 기부하게 된 이유입니다. "유지 보수가 쉬워서" 라는군요.
일반적으로 사우디인들에게 "유지-보수가 쉬운" 것으로 인식된 차량은 토요타 차량들입니다. 기본적으로 튼튼하고 시골 어느 구석에서 문제가 생겨도 부속을 구하기 쉬워서 나중에 팔았을 때 중고차 가격이 비싸 인기가 있거든요. 몇년 전만 해도 현대, 기아차들은 그런 면에선 나쁜 차량으로 인식되어 왔었습니다. 외곽으로만 나가면 부속을 구하기 힘들었으니까요. (갤로퍼 앞유리 하나 사겠다고 지잔 촌구석에서 젯다까지 왕복 2천킬로 길을 보내야만 했던 기억도...) 제가 첫 사우디 생활을 접을 무렵인 2002년 무렵 기아차 크레도스가 아시르 지역의 택시로 쫘악 깔린 걸 본 기억이 생생한데, 2008년에 다시 나왔을 때는 전부 캠리로 바뀌었기에 결국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었나... 싶었을 정도였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과거의 부정적인 인식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지 젯다 시내에서도 현대, 기아, 쌍용차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얼마전 은행에서 차례를 기다리면서 얘기를 나눴던 한 사우디인은 자신이 예전에 크레도스를 몰고다녔을 땐 정말 별로였는데, 지금 차들은 정말 좋더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더군요.
수많은 메이커들의 차량이 다니고 있는 사우디에서 기아차가 젯다 피해 이재민들에게 기부된 차량에 선정된 것만으로도 그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디자인도 디자인이지만, 쉬운 유지보수가 가능한 차량들이라는 이미지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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