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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지옥에나 떨어져라!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의 죽음을 보는 아랍인들의 차디찬 시선

둘뱅 2014. 1. 13. 15:49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수상의 죽음을 다룬 만평)


지난 토요일 8년간 코마 상태에 있던 아리엘 샤론 전 이스라엘 총리 (1924~2014)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오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을 더욱 악화시킨 주범 중 하나였던 그의 죽음에 분개하는 많은 아랍인들이 SNS를 통해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습니다.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피할 수 없었던 4차례에 걸친 아랍국가들과의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이끈 전쟁영웅으로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신의 사자 (The Lion of God)", "이스라엘의 왕 (The King of Israel)" 등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그였지만, 아랍인들은 그의 죽음에 대해 "지옥에나 떨어져라 (#RIH- Rest In Hell)라는 해시태그를 붙여가며 그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담긴 코멘트들을 날려 많은 공감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지금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보러 갈거야. 난 그 일이 샤론이 원하는 것이었다는 걸 확신해 (그는 유혈, 살상, 고문과 강간을 사랑했던 잔혹한 싸이코패스였지)" (@inabileh)

"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슬람 국가들을 위해 좋은 소식이야... 하나님 감사해요!" (@Mooly_alshehri/ 사우디)

"샤론은 "아랍 제1의 적"이라는 칭호와 인류를 위협하는 대학살자의 업적을 가져갔다." (@Sadiqjarrar/ UAE)

"바이바이 샤론. 어떤 죽음은 축하할 가치가 있어" (하비브 싯디끼/ 카타르)

"난 샤론이 공포 때문에 그의 출발을 지연시켰던 것이라 생각해 (코마 상태로 있던 것을 비꼬아). 그가 오늘밤 지옥에서 누구를 만날지 알아? 숨이 막힐 정도로 찐한 키스와 함께 그를 진심으로 환영할 아라파트를 포함한 그의 모든 적들." (하니 다흘란/ 쿠웨이트)


이런 저주에 가까운 코멘트들과 함께 하나의 냉소적인 짤막한 농담이 SNS를 통해 널리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더욱 위험한 악마 (샤론)가 지옥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사탄은 마침내 은퇴하기로 결심했어!"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 사람들이 그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이유는 그가 바로 아랍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단순한 공적이 아닌 "악마"로, 그를 "잔혹한 유대인 살인마"로 규정하게 만든 사브라-샤틸라 학살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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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라-샤틸라 학살사건은 레바논 내전 중 1982년 9월 16일 18시부터 18일 08시까지 약 38시간 동안 베이루트 서부 사브라 난민 캠프와 인근 샤틸라 난민 캠프에서 레바논 기독교 팔랑헤당 민병대원들이 그 안에 살던 팔레스타인 난민들과 레바논 시아파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민병대원들이 그야말로 끔찍한 살육을 벌이고 증거를 은폐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훼손된 시신이 많아 정확한 사망자수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762명에서 3500명 사이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사브라-샤틸라 학살사건은 새로 레바논 대통령에 당선된 마론파 기독교계 바시르 제마옐이 폭사당하고 이에 대해 팔랑헤당 (아랍어로는 카타입 당)이 복수를 결의하고, 레바논의 정국혼란이 이스라엘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아리엘 샤론 국방장관이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에 진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혼란의 근현대사 속에서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레바논 약사와 레바논 내전

레바논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다양한 이민족들의 침략을 받아와 딱히 이슬람 지역이라고 보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지역을 점령하면 세상을 정복한 것이라는 속설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 일대를 정복한 정복자들이 인증샷, 아니 인증비를 남겼을 정도였으니까요. ([견강 (Dog River)] 이 곳에 기념비 세우는 자! 곧 세계를 정복하였으니.. 참조)  


오늘날 레바논에 종파별 깊은 갈등과 반목의 불씨를 안긴 것은 바로 프랑스였습니다. 오스만 제국 붕괴 후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하면서 원래 레바논산 주위의 작은 지역에 불과했던 레바논에 대 시리아 (Greater Syria)의 변경지역이었던 항구도시 트리폴리, 베이루트, 시돈, 티레와 인접한 농촌 지역이었던 베카 계곡을 떼어내어 오늘날의 레바논으로 만들어 1941년 영국이 점령할 때까지 지배했던 것이죠. 프랑스로서는 "이이제이". 즉, 다양한 종파를 섞어놓아 뭉쳐서 독립하겠답시고 자신들에게 대항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신의 한 수 였겠지만, 얼결에 하나가 된 레바논의 입장에서는 15년간의 레바논 내전 (1975~1990)으로 이어진 분쟁의 씨앗을, 자신들의 영역이라 믿었던 부분을 옆나라에 떼어주게 된 시리아로서는 상당수가 원래 우리 땅이었으니 레바논도 우리의 영역이라며 레바논 내정에 개입하는 빌미를 제공한 셈이었죠.


어찌되었거나, 1944년 독립 당시 레바논은 1932년 인구조사에 근거하여 종파별 인구비례에 따라 정부 내 요직을 종파별로 배정하는 다소 독특한 "종파별 할당제"를 도입하게 됩니다. 대통령과 하원 의장은 기독교 마론파, 수상은 순니 무슬림, 의회 대변인은 시아 무슬림, 국방부 장관은 드루즈파, 외교부 장관은 그리스 정교.... 이런 식으로 말이죠. 작은 나라에 워낙 다양한 종파가 섞여 있으니 궁여지책으로 선택한 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 탄생한 레바논 정부를 이끌던 마론파 기독교도들은 팔레스타인 분쟁과 중동전쟁의 여파로 늘어나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에 대한 심각한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계속해서 유입되는 팔레스타인 난민에다 어쩔 수 없이 요르단에서 쫓겨난 PLO까지 받아들이게 되면서 레바논 내 무슬림들의 비중이 급증했기 때문입니다. 정부수립 당시 종파별 인구균형의 붕괴는 물론,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정치화되면서 거세지는 요구는 이들을 더욱 당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레바논을 이끌던 마론파 기독교도들이 PLO에 대해 결정적인 적대감을 갖게된 것은 1975년 레바논 내전이 시작되면서부터였습니다. PLO와 팔레스타인의 존재를 반대하고 정부수립 당시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마론파 기독교도들의 팔랑헤당이 주축이 된 레바논 전선 (LF)과 진보정당들의 연합체로 종파별 할당제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PLO를 지지하는 레바논 국민운동 (LNM) 사이에서 벌어진 레바논 내전 초기에 PLO 역시 개입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살 나라도 못 찾고 있는 PLO로서는 당초 남의 나라 내전에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해주는 레바논 국민운동 측의 협조를 받았을 때 마냥 거절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레바논 내전 개입은 그들을 반대해왔던 팔랑헤당에게는 이들을 공격할 빌미를 제공해 준 셈이 되었고, PLO는 탈 자으타르 난민 캠프를 팔랑헤당에게 점령당했던 약 50일 (1976년 6월 22일~8월 12일) 동안 2,5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살해당하는 것으로 그 댓가를 톡톡히 치룰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팔레스타인으로서는 레바논 내전에 개입하는 것보다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쪽을 택하게 되었지만, 팔랑헤당으로서는 자신들에 대한 잠재적 위험요소인 PLO에 대한 경계심으로 언제라도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었고, 이스라엘은 공동의 적인 PLO를 제거하기 위해 이들에게 무기를 제공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러는 와중에 1982년 6월 3일 PLO의 라이벌 무장세력을 이끌던 아부 니달이 PLO와는 무관하게 주영국 이스라엘 대사 슐로모 아르고프 암살을 시도하자 이스라엘은 이를 응징한다며 3일 뒤에 레바논을 침공하여 두 달간 점령하다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난민들을 베이루트 밖으로 안전하게 추방한다는 조건 하에 다국적군과 협정을 맺어 8월 21일 물러나게 되고, 이틀 뒤에는 마론파 기독교도인 바시르 제마옐이 대통령에 선출됩니다. 



바시르 제마옐 레바논 대통령 암살사건과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

협정이행의 과정으로 베이루트에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난민을 안전하게 추방하는 일련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는 와중에 바시르 제마옐은 9월 14일 팔랑헤당 당사를 무너뜨린 폭탄테러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이 테러를 자행한 폭탄테러범은 사실 팔레스타인쪽이 아니라 시리아 사회주의 국민당 (SSNP) 당원이자 시리아 정보부 비밀요원으로 밝혀진 레바논 마론파 기독교도인 하비브 샤르뚜니였으나, 팔레스타인과 무슬림 지도자들은 폭탄테러범과 그와는 관계가 없다고 부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엣가시였던 팔레스타인과 PLO를 몰아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이스라엘과 최대 피해자인 팔랑헤당에게는 그들을 응징할 좋은 빌미가 된 셈이었습니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암살사건이 일어난지 한 시간도 채 않되어 서베이루트를 점령하기로 결정하고 이츠하크 샤미르 외무장관에게만 침공 사실을 알려준 후 정부와의 협의없이 서베이루트 침공을 준비합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5일 정오 이스라엘군은 서베이루트를 철수한지 한 달도 않되어 서베이루트를 점령하지 않겠다는 미국과의 합의를 깨고 다시 서베이루트를 침공하여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캠프 출입구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난민캠프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를 설치하면서 완전히 봉쇄하게 됩니다.


다음날인 16일 아리엘 샤론과 라파엘 에이탄 참모총장은 폭탄테러사건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던 팔랑헤당 민병대장 엘리에 호베이카와 그의 민병대를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캠프 일대를 장악한 이스라엘군 진지에 초대하여 미팅을 갖고 바시르 제마엘 대통령 암살사건의 책임은 PLO에 있으며, 이에 대해 보복하겠다는 결론과 함께 오후 3시에 회의를 마칩니다. 


이스라엘군과 팔랑헤 민병대간의 수상한 움직임은 PLO를 이끌었던 야세르 아라파트에게 보고되었고, 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측에 당초 합의했던 대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다국적군을 다시 서베이루트에 재배치시켜 줄 것을 요구했지만, 이들 국가들은 아라파트와 PLO 무장세력들이 베이루트를 떠나는 것만 감시했을 뿐 그의 요청을 무시했습니다. 


다국적군이 아라파트의 요청을 무시한 가운데 이스라엘군과 팔랑헤 민병대간의 회동이 끝난지 세시간 뒤인 오후 6시 150명의 팔랑헤 민병대원들이 이스라엘군의 안내에 따라 사브라와 샤틸라 난민캠프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학살극이 시작되었으며, 이들 난민캠프를 둘러싼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도망을 막는 한편, 밤에는 조명탄을 발사하여 캠프 일대를 대낮같이 밝게 만들어주어 팔랑헤 민병대의 학살을 적극 지원하였습니다. 


사진으로 보는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의 참상=> 링크 1 & 링크 2

* 관심있으신 분들은 국내 TV를 통해 방영된 바도 있는 "바쉬르와 왈츠를 (Waltz with Bashir)"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찾아보시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거에요.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 이후...

이 무자비한 학살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이스라엘 내부에서 비판이 일자 베긴 수상은 카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진상조사를 위임했으나, 카한 위원회는 샤론 국방장관에게 본 학살사건의 직접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명시하면서도, 현지 분위기를 충분히 파악했더라면 이런 비극적 상황을 미리 막을 수 있었다는 "개인적인 책임"만이 있지만,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임하라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당초 이러한 위원회의 결론과 국내외의 강한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샤론 국방장관은 사임을 거부하고, 베긴 수상 역시 그의 경질을 거부했지만, 이스라엘군이 묵인한 사브라 샤틸라 학살사건을 비난하는 피스 나우의 평화시위 도중 누군가가 시위대열 속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이스라엘 교사 에밀 그룽즈바이크가 사망하고 10명이 다친 사고가 터지고 나서야 마저못해 5개월 뒤 국방장관에서는 물러났지만, 이스라엘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으로 잠시 있다가 산업무역노동부 장관 (1984~1990), 주택건설부 장관 (1990~1992), 에너지수자원부 장관 (1996~1999), 외무부 장관 (1998~1999) 등을 맡으면서 남아있다가 결국 제2차 인티파다를 촉발시킨 후 2001년 3월 제11대 수상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스라엘군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았을 뿐, 자국 정부와 상의도 없이 미국과의 협정을 깨고 군을 움직여서 난민캠프를 포위한 후 복수에 불타는 팔랑헤당 민병대를 끌어들여 그들이 자행하는 대학살극을 지원하며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며 즐겼을 주범인 그의 죄를 "개인적인 책임"으로 축소하여 발표한 이스라엘을 보는 아랍인들의 시선이 "악마"로 규정될 수 밖에 없는 결정적인 순간이 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을 넘어 아랍사람들에게 있어 이 대학살극를 기획하고 연출한 주역인 아리엘 샤론은 "잔혹한 유대인 살인마"로 남을 수 밖에요. 비록 그가 이스라엘 수상에 취임한 이후 다시한번 피바람이 불 것이라 여겼던 많은 아랍인들의 좌절과 달리 점령촌 철거와 평화협상, 가자지구에 40년간 주둔시킨 군대도 철수하려고 별 노력을 다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출처: "‘Rest in Hell’: How Arabs reacted to Sharon’s death on social media" (Al Arabiya) /

         "Sabra and Shatila massacre""Ariel Sharon"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