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 빈트 탈랄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공주의 아버지 탈랄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왕자)
영국 텔레그래프지의 보도로 크게 주목을 받게된 사건이 사라 빈트 탈랄 빈 압둘 아지즈 알 사우드 공주의 정치적 망명신청입니다. 그녀의 망명은 무즈타히드라는 트윗계정에 의해 예고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한 사우디 왕자가 운영진 중 한 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무즈타히드는 작년부터 사우디 왕실내의 수많은 비사를 폭로해 온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들은 한 포스트를 통해 사우디 왕실의 한 유명 인사가 영국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할 것이며, 그의 정체는 수일내로 밝혀질 것이라고 흘렸다고 하네요. 그리고 몇일 뒤 텔레그래프지의 보도로 탈랄 공주의 망명신청 소식이 전해지면서 망명 신청자의 정체가 공개되었죠. 이 사건을 통해 볼 수 있는 사우디 왕실 내 갈등을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딸 사라 공주와 아버지 탈랄 왕자의 갈등
표면적인 망명 사건의 시작은 주영 사우디 대사관이 사라 공주의 체류연장 신청을 아버지 탈랄 왕자의 요청에 의해 거절당하면서부터입니다. 서구적 스타일의 의상을 즐겨 입으며 바비 공주라는 별명을 가진 사라 공주는 다양한 사회활동과 여권신장 운동으로도 유명한데, 이러한 활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많은 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회활동에 앞장서왔던 아버지 탈랄 왕자의 영향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모녀 관계가 틀어지면서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자산동결 등 경제적으로도 많은 제약이 강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인 탈랄 왕자와 사우디 왕실과의 오랜 갈등관계를 살펴보면 근본적인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 탈랄 왕자와 사우디 왕실 간 정치적 갈등의 시작
사우디 국부 압둘 아지즈 국왕과 그의 13번째 부인으로 오스만 터키 제국 치하 동 아나톨리아에서 벌어진 아르메니아인 학살사건으로 부터 탈출한 난민 출신의 아르메니아인 부인인 무나이이르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난 탈랄 왕자는 "붉은 왕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12살에 45세의 압둘 아지즈 국왕과 결혼한 무나이이르 왕비는 미모와 지성으로 압둘 아지즈 국왕의 총애를 받은 왕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데, 탈랄이라는 이름은 베두윈 전통에 따라 3년만에 죽은 장남 탈랄을 기리는 의미로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친동생인 압둘라 현 사우디 국왕과 밀접한 동지로 알려진 나와프 빈 압둘 아지즈 왕자와도 사이가 나빠졌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사우디 정부와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와 서구 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는 1961년 서구식 헌법 도입을 국왕에게 제안하였다가 정치제도 개혁에 관심이 없었던 사우드 국왕에게 거절당하면서 오히려 재경부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1962년 여름 유럽에서 사우디로 귀국을 하려던 그는 리야드와 메카에 있는 자신의 집이 왕실 경호대에 의해 수색을 당하고 그의 집 중 하나가 친동생 나와프 왕자에 의해 점거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1962년 8월 15일 사우디 정부를 직접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열면서 정부와의 오랜 갈등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기자회견으로 여권이 말소되고 재산을 압류당했으며, 그의 지지자가 잡혀들어갔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중재로 사우디에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이집트에 머물렀던 그는 당시 사우디와 외교적으로 갈등이 있었던 가말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우호관계를 맺었기에 그의 가족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까지 당했다고 하네요.
그 이후 사우디 정계에서도, 왕권 승계 서열에서도 밀려난 그는 유엔 개발 아랍 걸프 프로그램 (Arab Gulf Program For The United Nations Development) 의장을 맡고 아랍 개방 대학을 여러나라에 세우는 등 다양한 NGO활동을 통해 교육과 여성의 사회활동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3. 압둘라 국왕 체제 하에서 다시 재개된 갈등
그는 2007년 9월 사우디의 민주화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우디에서는 불법인 정당제 도입을 주장하며 다시 사우디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게 됩니다. 압둘라 국왕이 이끄는 현 사우디 왕실과 갈등이 재개된 것은 2009년 압둘라 국왕이 나이프 왕자를 제2부총리로 지명하면서부터 입니다. 그는 이러한 지명 조치가 나이프 왕자를 차기 왕세제로 고려한 것이 아니냐며 제2부총리 선정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의 예상대로 2011년 10월 나이프 왕자가 왕세제로 지명되자 그는 다음달 국왕의 이러한 조치를 분명하게 반대하며 2007년 창설때부터 회원이었던 왕권 승계를 논의하는 충성 위원회로부터 탈퇴를 선언합니다.
이어서 2012년 4월 "정의의 손"이 왕국 내 모든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며, 국립 반부패 당국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우디 내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부패를 척결하는데 앞장설 것을 요구하였으며, 지난달 "알 꾸드스 알 아라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반대했던 나이프 왕세제와 살만 왕세제 선정과정에서 압둘라 국왕과 충성 위원회 간에 제대로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이러한 시스템은 21세기에 부적합하다고 정부를 비판한 바도 있습니다.
그의 비판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고 나이프 왕세제의 부도덕한 행위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사우디 왕실의 정신적, 재정적 부패와 공금횡령 등에 대한 부도덕성이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데일리 메일은 나이프 왕세제가 왕자였던 1993년 한 저녁 식사에서 사라 퍼거슨 공작부인에게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는 댓가로 50,000파운드 (당시 환율 약 6천만원)를 그냥 줬다는 보도가 나온 바도 있습니다.
2007년 이후 아버지 탈랄 왕자와 갈라선 사라 공주는 왕실과의 오랜 갈등과정 속에서 아버지와 적대하고 있던 고 나이프 왕세제, 압둘라 국왕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사우디 왕실 내에서 가장 진보적인 부녀가 정치적으로 맞서는 묘한 형세를 갖춘 것이 아이러니하긴 합니다만...
4. 갈등의 배경
그가 어린 시절 부유한 왕자들 중 하나가 되었을 때 그 부를 담당했던 사람들의 부패로 큰 어려움을 겪었던 경험에 의해 왕국의 부패척결에 관심을 갖게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의 사상적 기반을 바탕으로 현재 고령의 왕자들에게 승계되어지는 일련의 승계 과정에서 드러나는 불안요소들과 왕실의 부패를 조장하는 비민주적인 정치 제도 등 폐쇄적인 사회구조가 사우디 왕국을 구 소비에트 연방처럼 붕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 사우디 왕국의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압둘라 국왕이 점진적으로 중도 개혁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정책을 추진하는 것과 비교하면 탈랄 왕자는 진보적인 성향이랄까요.
5. 그리고 불안정한 사우디 왕실?
무엇보다 사라 공주가 망명을 신청한 시점이 공교롭게도 압둘라 국왕의 건강에 대한 여러가지 루머들이 돌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86살의 고령인 압둘라 국왕도 오랜 시간동안 지병을 앓아왔는데, 지난달 말부터 공식적으로는 확인되지 않은 압둘라 국왕의 사망설, 또는 모로코에서의 새로운 수술설 등 그의 건강과 안위에 대한 소문들이 돌기 시작했다는 불확실성이 그녀의 망명과도 어떤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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