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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담]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 지난 한일 월드컵 때 이야기...

둘뱅 2005. 12. 21. 00:29
   공교롭게도 요르단에서 맞이했던 98년도 프랑스 월드컵에 이어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사우디에서 맞이했었습니다... 다행히 포르투갈전부터는 한국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감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긴 했지만요... 그리고 3년이 지난 요즘, 2006년 독일 월드컵을 향한 최종 예선전이 한창입니다... 쿠웨이트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나라는 사우디에 이어 조2위에 머물고 있습니다... 지난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아시아의 양대 강국 사우디와 한국은 아주 극명한 대조를 보였습니다... 한 팀은 지난 몇십년 이래 최대 골차 패배라는 수모를 겪었고, 다른 한 팀은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던 4등을 했으니까요... 오랜만에 올리는 둘라의 아랍 이야기, 이번 호는 지난 월드컵 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만약... 한참 중계를 보고 있는데 이 순간 갑자기 TV가 망가진다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사우디서 보냈던 마지막 날, 미국전 때 이 황당함은 현실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경기를 보기 위해 완공일도 일부로 하루를 앞당기고 만반의 시청준비를 갖췄는데 태극기가 올라가자 마자 위성중계가 끊겨버려 경기결과를 알기 위해 부지런히 한국으로 국제전화를 걸어 확인해야만 했던 악몽이...)

 

   한일 월드컵 이전 월드컵은 우리에게 있어선 시차로 인해 항상 새벽잠을 설칠 것을 각오해야 했지만, 유럽과 한두시간 정도 차이의 시차밖에 없었던 아랍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좋은 유흥거리였습니다... 본선에 진출하던, 진출하지 못했던 그들은 월드컵 특별 증면된 신문을 통해 시시콜콜한 관련기사를 접하고, 공중파 방송을 통해 전 경기를 아주 편한 저녁, 혹은 밤 시간대에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한일 월드컵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기존과는 엄청난 변화와 충격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이유는...

 

1. 시청환경의 변화

   지난 98년 훨드컵까지는 TV를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만, 한일 월드컵은 돈 있는 사람들만 편하게 볼 수 있었던 그런 대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공중파 방송이나 무료 위성채널들을 통해서 월드컵을 생중계로 볼 수 있었던 반면에, 한일 월드컵은 높은 중계권료로 인해 거의 모든 공중파 방송이나 무료 위성방송들은 중계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거든요... 오직 유료 채널들만이 경기를 중계해주었고, 이를 보기 위해서는 별도의 수신기나 수신카드를 사야만했습니다.. 경제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사서 볼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경기를 보기 위해서 TV가 있는 주위의 집에 모여야만 했습니다... 제가 있었던 현장에서도 별도의 수신기를 구입해서 즐기려고 했었지만, 미국전을 보던 중 관중석에 태극지가 올라오던 순간에 수신기가 망가져 버린 이후로 결국 다음 경기들은 70여 km 떨어진 카페로 보러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2. 잔인했던 경기시간...

   유럽에서 할 때는 별로 문제될 게 없었던 경기시간이 저멀리 아시아에서 열리자 심각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시차로 인해 경기시간이 그들이 한참 일하거나 공부할 시간인 아침 9시대에서, 오후 4시 이전의 오침 시간대였으니까요... 월드컵에 열광하는 그들로서는 잔인할 수 밖에 없는 시간대였죠... 일하는 시간에 땡땡이치기도, 그렇다고 오침 시간대에 봐야하는 건 쉽지많은 않았을테니까요... 심지어는 수업시간을 조절해달라는 학생들의 요구가 있었을 정도였다는군요... 그 탓에 오후 5시 이후에 주로 문을 여는 카페들은 월드컵 특수가 거의 없었답니다... 녹화중계로 보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결과를 모르고 봐야하는 생중계의 짜릿함을 누릴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러한 지리적 거리감은 여행업계에도 악영향으로 찾아왔습니다... 유럽에서 하던 때처럼 월드컵 관련 패키지 상품들을 내놓긴 했지만, 선뜻 여행을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일반적인 경제력으로 감당하기에 멀고도 먼 나라 일본여행상품은 너무나도 비쌌으니까요...그리고 지리적, 경제적 악재로 불난 여행업계에 기름을 껴얹은 건 아이러니하게도 사우디 국가대표팀이었습니다... 그나마 예약했던 손님들을 예약취소 사태로 몰아버리고 말았으니까요...

 

3. 참담한 패배, 그리고 한국의 대단한 약진...

   대회 시작 2일째, 아시아권 국가로는 제일 먼저 경기를 치뤘던 사우디는 모든 아랍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아랍축구의 맹주임을 자처하던 사우디가 독일에 의해 철저하게 유린당했으니까요... 지난 98년 월드컵 때 3대0 패배의 치욕을 비웃기라도 하듯, 8대0이라는 보기드문 점수차로 대패했으니까 말이죠... 이 결과로 사우디 사람들은 충격에 빠져버렸고, 다른 아랍사람들은 거들먹 거리던 그들을 조롱하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이 패배와 더불어 여행업계의 월드컵 마케팅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열받아서 여행 스케줄을 취소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이 패배가 사우디인들에게 더욱 잔혹했던 것은 이 믿기지 않은 경기결과가 경기전날 선수들의 향락활동에서 빚어진 것이란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외간여자에 대한 접촉을 금지하고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저 멀리 타지까지 가서 흥청망청 엔조이한 것이 무기력한 경기를 펼치게 만들었던 원인이었다는 사실은 생각하기도 싫은 이유였으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충격을 잊게해 준 것이 바로 우리 국가대표팀이었습니다...^^ 사우디가 8대0으로 진 그 이틀 뒤, 폴란드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죠... 한국의 승전보는 그 다음날 신문에 월드컵 특집으로 증면된 스포츠면은 물론이거니와 사회면을 활용하면서까지 널리 전해졌습니다.. 아시아 축구의 자존심을 살렸느니 어쨌느니 하면서 상사 주재원부터 다른 사우디인, 동양인들의 소감들을 소개한 별도의 박스기사가 날 정도였으니까요...

   위에서도 말했듯이 전 미국전 다음날 돌아왔기 때문에 그 후의 반응을 알 수는 없었습니다만, 남아있던 현지팀의 이야기를 통해 분위기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한국의 쾌거에 오후 5시나 되야 여는 리조트지의 카페가 생중계로 보고 싶어하는 한국 사람들을 위해 일찍 카페를 여는 수고를 감수했다고 하니까요... 그 덕에 현지팀은 TV를 보기 위해 왕복 140킬로를 달려야했지만요...

 

   이랬던 지난 월드컵의 결과로 인해 지난 1차전에서 사우디팀이 한국팀을 2대0으로 꺾었을 때 그들의 반응이 어땠을지 연상이 됩니다... 거리가 떠나가라 크락숀과 축포를 올리며 광란의 밤을 보냈으리란 건 쉽사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두 경기 남은 지금까지의 결과로 미루어볼 때 이변이 없는 한 이번에도 한국과 사우디는 나란히 진출하게 되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16강을 바라보던 모로코가 브라질전에서 아랍권 국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미국인 심판의 어처구니 없는 판정으로 졌다고 분노하다 알제리인의 후손인 지네딘 지단의 활약으로 프랑스가 우승했을 때 비열한 브라질에 알라의 공정한 심판이 내린 것이라며 내 일처럼 좋아했던 98년도 프랑스 월드컵...

   비록 사우디는 믿지 못할 참패를 겪어 절망에 빠뜨렸지만, 한국의 쾌거로 인해 아시아권 축구의 자존심을 살린 것이라며 같이 좋아했던 02년도 한일 월드컵...

   

   이 두 대회에 이은 다음 독일 월드컵은 아랍인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