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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둘뱅 2013. 6. 4. 18:04

 

아랍어로 "형제들"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크완은 정규군은 아니었지만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주력군으로 편성된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종교적 민병대로 사우디 통일전쟁을 통해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대부분의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는데 성공하며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하는데 핵심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이크완의 형성과 몰락

이크완은 1910년 리야드와 쿠웨이트를 있는 도로 주변에 있는 알아르타위야라는 베두윈 캠프지에 거주하던 무타이르 씨족을 중심으로 한 베두윈 부족들로 결성되었습니다. 영국의 탐험가이자 여행작가이기도 한 윌프레드 세시저 경 (Sir Wilfred Thesiger/ 1910.06.03~2003.08.24)에 따르면, 이 호전적인 종교 형제단은 자신들을 이슬람의 정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는 집단이라 선언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유목생활과 이슬람을 철저히 신봉하는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 느꼈기 때문에 엄격한 종교생활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이미 정착해있던 타 씨족들을 쫓아내고 베두윈들을 그들이 있던 우물과 오아시스 부근에 머물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이는 와하비즘에 입각한 이슬람원리주의를 표방하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의 신념과도 잘 맞았기 때문에 그들을 활용하여 아라비아 반도 내 통일전쟁에서 자신의 권력을 확장시켜나가며 승승장구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자발 샴마르 토후국과 헤자즈 왕국등을 무력화시키면서 통일에 집중하는 와중에서도 이크완은 쿠웨이트와 트랜스 요르단까지 찝쩍거리다 쫓겨나며 적으로 삼고 싶지 않은 영국을 포함한 주위 국가들과 정치적, 외교적으로 난처해지는 상황을 막아보고자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이크완들에게 이웃 국가에 대한 침공을 금지시켰을때, 아라비아 반도 바깥으로도 영토를 확장시키고 싶어했던 그들은 그가 권력에 눈이 멀어 종교적으로 나태해졌다고 비난하며 훗날 반란을 도모하게 됩니다. 
1926년 헤자즈를 정복하고 현재의 사우디 영토 전부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지배 하에 두면서, 그는 주위의 적이 없어진 이상 통제불가능해진 이크완과의 갈등이 자신의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그간 벌어지고 있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이크완의 유대관계가 끊어지면서 1927년부터 이크완들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대한 유혈반란을 일으켰으나, 1930년 사빌라 전투를 계기로 진압당하게 됩니다. 

 

 

    

 

(이크완의 주요 지휘자 술탄 빈 바자드 알 오타이비 (좌)와 파이살 빈 술탄 알 두와이쉬 (우))

 

이크완의 쌍두마차

 

파이살 빈 술탄 알 두와이쉬 (1882~1931)는 이크완 형성의 중심세력이었던 무타이르 씨족의 왕자이자 주요 지휘자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를 도와 사우디 통일전쟁을 지원했었습니다. 그는 훗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이크완의 분열을 야기했던 자흐라 전투 (1920.10.10) 등 아라비야 반도 동부 지역에서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 (1919~1922)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이크완 반란 중 1929년 사빌라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쿠웨이트로 도망쳐 영국군에 항복했습니다. 그는 한때 자신이 모셨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에게 사죄하였으나 결국 리야드에 압송되어 투옥 중인 1931년 동맥질환으로 병사하게 됩니다. 

 

 

그의 전우이자 또 한명의 지휘자인 술탄 빈 바자드 알 오타이비 (1876~1931)는 이크완을 이끌고 서부 전선인 알하사, 하일, 알바하, 지잔, 아시르, 메카와 젯다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헤자즈 왕국을 사실상 무너뜨리고 영토를 정복했던 알쿠르마 분쟁 (제1차 네즈드-헤자즈 전쟁, 1918.07~1919.07), 트랜스 요르단 침공 (1922~1924)타이프 함락 후 3~400명의 타이프 주민을 학살한 타이프 학살 (1924.09.03), 타이프에서 도망처 온 후세인 빈 알리를 젯다로 다시 도망가게 만든 메카 전투 (1924), 헤자즈 왕국을 멸망시킨 젯다 전투 (1925.02.10~12.17) 등 헤자즈 왕국 정복전에 참전했으며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대항하여 이크완 반란을 주도했다가 사빌라 전투에 패하고 이크완이 궤멸되면서 힘을 잃어 결국 1931년 이크완의 본산지인 베두윈 캠프지 알아르타위에어 살해당합니다. 와하비즘을 믿지 않으면 전부 이교도로 간주하는 살라피즘에 입각한 강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크완의 무기와 전투 스타일

비정규 부족 민병대인 이크완은 주로 창, 검과 간혹 구식 화기류와 같은 전통적인 무기로 무장했었습니다. 보통 그들은 아라비아반도의 사막을 주무대로 활약해던 베두윈 스타일로 급습하는 방식의 공격을 사용했고, 급습자들은 낙타와 말을 이용하여 이동했습니다. 네즈드 지역 내 혹은 외곽 내 다른 세력들에 대한 그들의 야만적인 공습은 그야말로 무자비했다고 전해집니다. 전형적으로 그들이 생포한 모든 남성들의 목을 잘라 사형했다고 전해져 올 정도니까요. 

 

(진격의 이크완)

 



이웃국가들에 대한 이크완들의 공습 (1919~1924)오스만 제국이 멸망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라쉬드 씨족 및 하쉼 씨족과의 경쟁에서 결정적인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을 때, 정규군에 편성되어 있지 않았던 이크완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사전 승인없이 이웃국가인 쿠웨이트와 트랜스 요르단에 대한 침공을 감행합니다.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 (1919~1922)과 트랜스 요르단 침공 (1922~1924)은 이크완들이 독단적으로 감행한 전쟁들로 영국군의 개입으로 패퇴하는 동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방관만하게 되면서 단단했던 양측 사이의 관계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최대 라이벌들을 타도하고 독점적인 권력을 쥐게 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로서는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 무모하게 행동하는 이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고,  이크완으로서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져 든든한 후원자였던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

[역사] 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참조)

 


이크완 반란 (1927~1930)의 배경조금씩 앙금이 쌓이며 불편해져만 갔던 그들의 관계는 헤자즈 왕국을 무너뜨리고 공공의 적이 없어진 1926년을 기점으로 더욱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헤자즈 정복 후 이크완의 일부 지도자들은 기세를 살려 와하비주의자들의 영토를 영국 보호령 하의 트랜스 요르단, 이라크, 쿠웨이트로 계속해서 확장시켜 나가기를 희망했습니다. 비록 영국군에게 참패당하고 물러났지만, 위에서 언급한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과 트랜스 요르단 침공은 그들의 추구하던 야망을 실현시키려는 과정의 일부였던 셈이죠. 
이크완은 자신들의 야망을 실현하는데 있어 반대하는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세력을 과소평가하면서 그의 통제권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전화, 자동차와 전보 등 서구의 최신문물을 도입하고 자신의 아들을 불신자들의 나라로 칭했던 이집트로 보낸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를 본격적으로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로서는 새로 도입되는 문물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현실적 명분 외에도 압둘아지즈가 이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면서 종교적으로도 해이해졌다는 나름의 종교적 명분도 함께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이크완의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1927~1928)이크완의 비종교적 만행을 이슬람 종교학자 (울라마)에게 고발하면서 종교적인 가르침으로 그들을 온건하게 만들려던 압둘아지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알 두와위시의 명령을 따르는 이크완 조직은 1927년 11월 5일 남부 이라크를 침공하여 부사이야 근처에서 이라크군과 충돌하여 양측 각각 20여명의 전사자를 잃은 채 전투를 멈추게 됩니다. 이크완이 침공한 남부 이라크는 영국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의해 세워진 아라비아반도와 이라크 사이의 사우디-이라크 중립지대였으며, 1928년 1월에는 쿠웨이트를 다시 공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차례의 전투 모두 이크완은 낙타와 양떼를 활용하여 침공하여 악랄하게 공습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군은 네즈드를 폭격하는 등 국제적인 분쟁까지 초래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날뛰는 이크완들을 더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1928년 의회를 소집하여  반란의 주모자인 이븐 후마이드 앗 다르위시와 이븐 히쓰라인을 추방시켜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29년 1월 이크완은 쿠웨이트 수장국을 침공하여 그 과정에서 다른 미국인 자선과 찰스 크레인과 함께 자동차로 여행 중이던 미국인 선교사 빌커트가 살해당합니다. 계속되는 이크완의 쿠웨이트 침공에도 불구하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이 그들을 제지시키기 위한 군대를 파병하려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영국 공군의 주둔은 쿠웨이트로 확장되었습니다. 

 

 

 

 

(사우디 건국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오래된 사진들. 이크완이 반대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사빌라 전투 (1929.03.29~31)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이크완을 통제하기 위해 자신의 군대를 파병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통제불능 상태가 된 이크완들의 침공에 동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크완들은 모든 비 와하비주의자들이 이교도들이라고 가르쳐왔음에도 불구하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이교도들인 영국과 직접 충돌하는 것은 자신들에게도 위험한 무모한 짓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이크완들은 1928년 12월 공개적 반란을 일으켰으며, 양측간 첫번째 대규모 충돌은 1929년 3월 30~31일 사이에 벌어졌던 사빌라 전투 (Battle of Sabilla)로 이는 이크완들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였으며, 그 결과 이크완 지도층들이 말살당하게 되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는 또한 

이크완이 혐오하던 근대화의 상징인 영국 비행기 4대와 군용차량 200대의 지원을 받으며 기갑부대와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군에게 구식 무기를 들고 저항하던 이크완들이 살육당하는 현장이기도 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크완 500여명이 전사한 반면,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군은 200명 남짓의 군사들만 전사했을 뿐이었습니다.

 

 

 

자발 샴마르 전투 (1929,08)와 아와짐 씨족 공격 (1929.10.05)

1929년 8월 라쉬드 씨족의 중심지였던 자발 샴마르 지역에서 파이살 빈 술탄 알두와이쉬의 아들 아자이이즈 빈 파이살 알 두와위쉬가 이끄는 무타이르 씨족군과 네즈드-헤자즈 왕국의 동맹군이었던 니다 빈 나히르가 이끄는 샴마르 씨족이 결전을 벌인 자발 샴마르 전투는 이크완 반란에서 두번째로 큰 전투로 양측 합쳐 1천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한 끝에 샴마르 씨족군이 승리하며 네즈드 헤자즈 왕국군에게 승리를 선사했습니다. 하지만,  이크완은 자발 샴마르 전투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1929년 10월 5일 아와짐 씨족을 공격하여 250여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등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대한 반란을 이어갔습니다.

 

 

 

 

(이크완이 특히 반대했다고 전해지는 새로운 서구문물 전화와 당대의 우표 등)

 

 

 

이크완의 궤멸과 그 이후...

이크완들의 반란은 계속 이어졌지만, 승기를 잡을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아와짐 씨족 공격이 끝나고 얼마되지 않아 주동자 중 한 명으로 부상 중이던 파이살 알 두와위시가 쿠웨이트로 도망쳤고, 1930년 1월 10일 이크완 지도자들이 영국에 항복하면서 네즈드-헤자즈 왕국군은 마침내 이크완들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합니다.

 

이크완이 궤멸되면서 남아있던 이크완의 지도자들은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이크완의 쌍두마차 중 한 명이었던 술탄 빈 바자드 알 오타이비는 1931년 알아르타위야 베두윈 캠프에서 살해당했고, 쿠웨이트로 도망갔다가 잡혀 리야드 형무소에서 투옥 중이던 파이살 알 다르위시 역시 같은 해 10월 3일 옥중에서 병사합니다. 그리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은 잔여 병력들 중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을 친위조직이자 지난 5월 국가방위부로 격상된 사우디 국가방위군에 통합 편성시켰습니다. 이러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채용정책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왕실과 지방 씨족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써 국가방위군은 인력 선발시 사우디 내 주요 씨족들로부터 영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 과정에서 용맹과 악명을 함께 떨쳤던 이크완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참조: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