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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둘뱅 2013. 6. 2. 19:51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영토)

 

수도인 하일의 이름을 따 하일 토후국 (Emirate of Ha'il)으로도 알려져 있는 자발 샴마르 토후국 (Emirate of Jabal Shammar)은 1836년부터 압둘아지 빈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알 사우 (1876.01.15~1953.11.09, 이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손에 멸망한 1921년까지 아라비아 반도 네즈드 지역에 있던 토후국입니다. 아랍어로 "샴마르의 산"이라는 뜻을 갖고 있는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당대 아라비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해 나가던 사우드 씨족의 최대 라이벌이 된 라쉬드 씨족이 통치하는 국가였으며, 그 영토는 오늘날의 사우디, 이라크, 요르단의 일부로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1836년 건국되어 패망하는 그날까지 네즈드 지역의 통치권을 놓고 사우드 씨족과 다퉈왔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라쉬드 씨족은 제2사우디 국가 왕실의 내분 속에서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재탈환하고 국가발전의 토대를 쌓은 이맘 파이살 빈 투르키를 지원하면서 사우드 씨족과 혼인관계까지 맺은 애증의 관계였죠. 만약 사우드 씨족이 라쉬드 씨족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패했다면,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라쉬디아라비아 왕국???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국기)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통치자들

1대 아미르: 압둘라 빈 알리 알 라쉬드 (1836~1847)

2대 아미르: 탈랄 빈 압둘라 알 라쉬드 (1847~1866)

3대 아미르: 무타입 빈 압둘라 알 라쉬드 (1866~1869)

4대 아미르: 반다르 빈 탈탈 알 라쉬드 (1869~1869)

5대 아미르: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 (1869~1897)

6대 아미르: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 알 라쉬드 (1897~1906)

7대 아미르: 무타입 빈 압둘아지즈 알 라쉬드 (1906~1907)

8대 아미르: 술탄 빈 함무드 알 라쉬드 (1907~1908)

9대 아미르: 사우드 빈 함무드 알 라쉬드 (1908~1910)

10대 아미르: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 라쉬드 (1910~1920)

11대 아미르: 압둘라 빈 무타입 알 라쉬드 (1920~1921)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건국, 그리고 바르잔 궁의 완공

아미르 압둘라 빈 알리 알 라쉬드 (1788~1847.04)는 동생인 우바이드 빈 알리 알 라쉬드 왕자 (1792~1865)와 함께 자아파르 알 샴마리 (Jaafar Al-Shammari) 혈통의 일원으로 당시 하일지역을 통치하던 무함마드 빈 알리에 대한 반란을 주도하여 승리하면서 하일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는 반란 성공 후 불안정했던 하일과 그 일대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하일 지역을 안정화시킨 후 왕실 내 세력다툼으로 쫓겨나 지지기반이 없었던 사우드 씨족의 파이살 빈 투르키를 지원하여 그의 정권 재탈환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새로 이맘이 된 파이살 빈 투르키는 압둘라 빈 알리 알 라쉬드를 하일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혼인까지 맺게 됩니다. 한편 그의 반란을 지원한 공동 건국자 동생 우바이드 빈 알리 알 라쉬드는 형에게 후계자 자리를 요구했지만, 결국 공식 후계자 자리는 그의 아들 탈랄에게 넘어갔습니다.

 

아미르 압둘라의 아들이자 2대 아미르가 된 탈랄 빈 압둘라 (?~1866)는 자유주의에 입각한 통치와 이라크까지의  무역 장려, 그리고 큰 관심을 기울였던 건축 프로젝트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발 샴마르 토후국이 하일에 건국되기 전인 1808년부터 하일의 통치자였던 무함마드 빈 압둘라흐만 알 알리가 시작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했던 바르잔궁 (Barzan Palace)을 완공시켰습니다. 바르잔 시장 근처 30만 평방미터의 부지 위에 세워진 3층짜리 궁전인 바르잔궁의 1층에는 리셉션 홀과 정원, 부엌이, 2층에는 외교사절단을 위한 접견실이, 3층에는 왕실가족들의 방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1921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멸망시킨 후 파괴할 것을 명령하여 현재는 일부 유적만이 남아있습니다.

 

 

(바르잔궁의 유적)

 

자발 샴마르 토후국 발전의 토대를 닦은 아미르 탈랄 빈 압둘라는 당시 18세, 혹은 20세로 추정되는 장남 반다르 빈 탈랄 (?~1869)을 포함한 7명의 아들을 남겨놓은 채 1868년 혹자는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수상한" 총기사고로 사망하게 됩니다. 장남 반다르가 비교적 어린 나이였기에 탈랄의 후계구도를 놓고 무함마드 빈 압둘라 (?~1897)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1년간 라쉬드 씨족 내 권력 쟁탈전이 벌어지는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시작은 막장이었으나, 제2사우디 국가를 멸망시키며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아미르 무함마드 빈 압둘라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전성기를 이끈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의 사진)

 

탈랄 빈 압둘라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라쉬드 씨족의 장로들과 샴마르 지역의 통치자들의 추대를 받아 탈랄의 동생 무타입 빈 압둘라 (~1869)가 다음 아미르가 되었으나, 아미르가 된지 불과 1년만에 바르잔궁 안에서 조카이자 형의 아들인 반다르 빈 탈랄이 겨눈 총에 맞고 살해당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반다르는 자신들의 삼촌이 납탄환을 막아낼 방어구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살해하기 위해 은탄환을 사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삼촌을 살해하고 아미르가 된 반다르 빈 탈랄 역시 피의 보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반다르는 자신이 죽인 삼촌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슬하에 아들을 한 명 두었으나, 아미르가 된지 얼마 안되어 하일 외곽에서 작은 삼촌인 무함마드 빈 압둘라와 대치 중 그에게 살해당하고야 맙니다. 반다르를 살해한 무함마드는 하일로 돌아와 자신을 새로운 아미르로 선포하고, 조카들에게 자신이 저질렀던 피의 보복으로 되갚음 당할까 두려웠던 나머지 살아있는 모든 반다르 빈 탈랄의 형제들 (바드르를 포함한 6명)과 사촌들 (탈랄 빈 압둘라 누이의 자녀들), 그리고 그들이 거드리던 하인과 노예들을 전부 사형시켜버립니다. 그 응징 속에 살아남은 건 탈랄의 동생 바드르와 아들 나이프 뿐이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바드르는 훗날 삼촌에게 보복을 시도했다가 역시 살해당했고, 살아남은 나이프의 손자 무함마드 빈 탈랄 빈 나이프는 훗날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마지막 아미르가 됩니다....

 

조선시대 태조 이방원의 권력 집권과정을 보는 듯한 피로 얼룩진 막장 극장 끝에 탄생한 아미르 무함마드 빈 압둘라 정권은 오랫동안 자발 샴마리 토후국에 "내치 안정, 영토 확장과 번영의 전성기"를 안겨준 성공적인 통치를 하게 됩니다. (막장 후 번영, 그것마저도 비슷하네요......) 북쪽으로는 알자우프 지역과 팔미라까지, 서쪽으로는 타이마와 카이바르까지 영토를 높이게 됩니다. 그가 이뤄낸 영토확장 전쟁의 백미는 단연 제2사우디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1891년 물라이다 전투를 통해 제2사우디 국가의 이맘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 알 사우드 (1850~1928)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그와 그의 추종세력을 추방시키면서 제2사우디 국가를 멸망시키고 자발 샴마르 토후국에 합병시켜버린 것입니다.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의 원인이 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귀환과 까심지역 쟁탈전

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와 그의 어린 아들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를 비롯한 사우드 씨족들이 쿠웨이트로 망명을 떠나자 무함마드 빈 압둘라는 북쪽에 있던 오스만 제국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3대 아미르이자 암살당했던 형 무타입의 아들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1906.04.12)을 후계자로 임명하면서 나라를 융성하게 발전시킨 자신의 사후에 그 권력을 노리고 일어날지 모를 정국불안에 미리 대비했습니다. 형들의 죽음 속에서 자신이 조카들과 겪어야만 유혈사태가 되풀이되는 것을 원치는 않았을테니까요.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의 후계자, 하지만 리야드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게 다시 빼앗기고 라우다 무한나 전투에서 전사한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 알 라쉬드)

 

 

그의 대비책은 절반의 성공만 거두게 되는데, 후계문제에 있어서는 그가 노환으로 사망하자마자 자신이 후계자로 내세웠던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이 주위의 반대없이 자연스레 아미르가 되면서 성공을 거두었지만, 가장 기대했던 동맹이자 후원자였던 오스만 제국이 지지세력과 통치력을 잃어가면서 결과적으로는 그 영향으로 후계자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의 통치까지 불안정해지면서 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 절반의 실패로 인해 쫓겨간 쿠웨이트에서 와신상담하던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통치가 불안정해지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네즈드 지역으로 돌아와 1902년 무함마드 빈 압둘라에게 빼앗긴지 11년만에 리야드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면서 우려했던 상황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리야드 재탈환을 계기로 다시 한번 사우드 씨족이 통치하는 제3사우디 국가 (네즈드-하사 토후국)를 세우면서 네즈드 지역을 쟁탈하기 위한 까심지역 쟁탈전 (1903~1907년/제1차 사우디-라쉬디 전쟁)에 들어가자 전쟁 초기 아미르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은 오스만 제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그들이 파병한 군대와 함께 연합군을 이뤄 압둘아지즈군을 대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전력상 열세인 상황 속에서 게릴라전으로 전환하여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잡은 승기를 뒤집지 못한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라우다 무한나 전투 (Battle of Rawdah Muhanna, 1906년)에서 패하고 아미르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마저 전사하는 최악의 결과로 전쟁이 마무리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게 패한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왕실 내 권력다툼 속에 멸망의 길로....

라우다 무한나 전투에서 전사한 아미르 압둘아지즈 빈 무타입의 뒤를 이어 아미르가 된 무타입 빈 압둘아지즈 (1888~1906.12)는 씨족 전체의 지지를 받는데 실패하면서 취임한지 1년도 안되어 술탄 빈 함무드 (?~1908)에게 살해당합니다.

 

자발 샴마르 토후국 건국에 기여했으나 형의 후계자가 되는데는 실패했던 우바이드 알 라쉬드의 손자인 술탄 빈 함무드가 무타입 빈 압둘아지즈를 살해하고 정권을 잡았으나 그의 할아버지와 건국자 사이에 맺어진 서약을 무시했기 때문에 왕실 내부의 비판을 받았으며, 그 비판을 상쇄할 수 있는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의 싸움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 결국 형제들에게 살해당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한 사우드 빈 함무드 (?~1910) 역시 정권을 잡은지 2년만에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1898~1920)의 외척 세력들에게 살해 당합니다.

 

 

(자발 샴마르 토후국 말기에 외척의 섭정 하에 그나마 오랫동안 통치했던 아미르 사우드 빈 압둘 아지즈 알 라쉬드. 현 압둘라 사우디 국왕 모친의 전남편.)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가 아미르에 추대된 것은 불과 10세 때의 일로 그가 성장할 때까지 그의 외척 세력인 사브한 씨족이 이마라 헌법에 의거한 섭정으로 그를 대행하여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1920년 3월 즉위 10년만에 사촌이자 자발 샴마르 토후국의 마지막 아미르 무함마드 빈 탈랄의 형제인 압둘라 빈 탈랄에게 암살당합니다. 이러한 내부 분열과 더불어 쇠락의 길을 걷던 자발 샴마르 토후국에게 재기불능의 치명타를 안겨준 것은 그들의 강력한 지원군이자 동맹국이었던 오스만 제국마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멸망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반대로 아라비안 반도에 영향력을 끼치는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대영제국과 손을 잡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로서는 앙숙인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궤멸시킬 절호의 기회를 만난 셈이었죠.

 

한편 다섯명의 부인과 결혼했던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의 미망인들 중 두 미망인은 훗날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의 첫째 부인으로 두명의 아들을 낳았던 파흐다 빈트 아쉬 알 슈라임 (?~1934)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9번째 부인으로 재혼하여 3명의 자녀를 더 낳고 사망하게 되는데, 그녀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사이에서 낳은 장남이 바로 현재 사우디를 통치하고 있는 압둘라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 (1924~현재)입니다.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라쉬드 씨족의 미망인과 결혼한 것은 라쉬드 씨족과의 휴전을 강화하고 라이벌이었던 그들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혹시나 있을지 모를 라쉬드 씨족의 도발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인질과 같은 역할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1920년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를 암살한 압둘라 빈 탈랄은 13살짜리 압둘라 빈 무타입(?~1946)을 아미르로 내세웠으나 즉위한 지 1년만인 1921년 군사동맹인 이크완과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네즈드 술탄국이 일으킨 하일 정복전 (1921년/제2차 사우디-라쉬디 전쟁)에서 패하고 그의 뒤를 이은 무함마드 빈 탈랄 (?~1954)이 같은 해 11월 2일 하일에서 리야드에 압송된 후 네즈드 술탄국에게 항복하고 영토가 합병되면서 자발 샴마르 토후국은 1세기도 버티지 못한채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무함마드 빈 탈랄의 부인 누라 빈트 십반은 그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의해 투옥된 후 그와 결혼했으며, 무함마드 빈 탈랄의 딸 중 한 명인 와트파 빈트 무함마드 빈 탈랄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15번째 아들 무사이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 (1923~현재)와 결혼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둘 사이에 낳은 아들  파이살 빈 무사이드 빈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왕자 (1944.04.04~1975.06.18)는 1975년 사우디 3대 국왕인 파이살 국왕 (1906.10.10~1975.03.25)을 암살하고 공개 참수형을 당합니다.

 

한편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대다수는 사우드 씨족과 영국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에서 추방당해 오늘날 시리아와 이라크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참조: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