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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둘뱅 2013. 5. 29. 01:53

 

 

(제2사우디 국가의 영토)

 

네즈드 토후국 (Emirate of Nejd)이라고도 불리는 제2사우디 국가는 19세기 초반부터 후반에까지 존재했었습니다. 사우드 씨족은 제2사우디 국가를 세우면서 7년간의 오스만-사우디 전쟁 끝에 1818년 오스만제국-이집트 연합군의 침공으로 내주고야 말았던 아라비아 반도의 중부와 동부지역을 되찾는데 성공하고야 말았습니다. 제2사우디 국가는 제1사우디 국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영토 확장이나 종교적 열기에 집착한 성지파괴 등의 행위들은 심하게 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영토도 좁고, 외부에서의 반감을 더 이상 사지도 않았습니다. 사우드 씨족의 지도자들은 제1사우디 국가와 마찬가지로 이맘이란 호칭을 그대로 유지하고, 와하비즘을 추종하는 종교학자들을 고용하긴 했지만요... 그만큼 제1사우디 국가 시절에 많이 파괴했다는 의미도 되겠고, 어떻게 보면 제1사우디 국가의 멸망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되었을 수도 있겠죠.

 

과격한 영토확장과 유일신 사상에 몰두한 성지파괴 행위로 주변의 반발을 산 것이 몰락의 계기가 되었던 제1사우디 왕국과 달리, 제2사우디 왕가는 스스로 몰락을 자초했습니다. 위에서 설명드렸듯 외부의 반감을 크게 사지는 않았지만, 사우드 씨족 내의 심한 분열과 갈등이 세력의 약화를 가져온 셈이었죠. 건국에서 몰락까지 이맘이 총 14번 바뀌었는데, 실제로는 8명의 이맘이 쫓겨났다 재집권했다를 반복했을 정도로 지도층의 분열은 극심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제2사우디 국가의 국기)

 

 

제2사우디 국가의 통치자들

1대 이맘: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 (1819~1820) (첫번째 임기)

2대 이맘: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 (1821~1834) (두번째 임기)

3대 이맘: 무샤리 빈 압둘라흐만 빈 무샤리 (1834~1834)

4대 이맘: 파이살 빈 투르키 빈 압둘라 (1834~1838) (첫번째 임기)

5대 이맘: 칼리드 빈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1838~1841)

6대 이맘: 압둘라 빈 쑤나이얀 빈 이브라힘 (1841~1843)

7대 이맘: 파이살 빈 투르키 빈 압둘라 (1843~1865) (두번째 임기)

8대 이맘: 압둘라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65~1871) (첫번째 임기)

9대 이맘: 사우드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71~1871) (첫번째 임기)

10대 이맘: 압둘라 빈 투르키 (1871~1873)

11대 이맘: 사우드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73~1875) (두번째 임기)

12대 이맘: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75~1876) (첫번째 임기)

13대 이맘: 압둘라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76~1889) (두번째 임기)

14대 이맘: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빈 투르키 (1889~1891) (두번째 임기) 

 

 

 

 

(제2사우디 국가의 수도이자 오늘날 사우디 왕국의 수도 리야드의 당시 모습)

 

리야드를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재건, 그리고 시작된 사우드 씨족간의 권력다툼

제1사우디 국가가 멸망한 1818년, 살아남은 사우디 씨족과 와하비즘 추종자들의 지도력을 물려받게 된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 (1755~1834)는 이집트군의 체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디리야가 함락되자마자 사막으로 도망쳐 나와 타밈 씨족의 알 코라이프 왕자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서 난민생활을 하며 와신상담하기 시작합니다. 

 

조용히 세력을 키우던 그는 3년 뒤인 1821년 이집트인들에 대항하는 혁명을 뒤에서 이끌기 시작하여 디리야와 그 일대를 통치하는 통치자로서의 위치를 확립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아픈 기억이 있는 디리야를 떠나 리야드를 새로운 수도로 삼아 오늘날 사우디 왕국의 수도이기도 한 리야드가 사우디 역사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면서 진정한 제2사우디 국가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과 대치했던 제1사우디 국가와 달리 제2사우디 국가는 어느 정도 오스만 제국의 통제를 따르게 됩니다.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도 아라비아 반도까지 영향력을 넓힌 이집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는 걸 견제하기 위해서였겠지만요.
강력한 리더쉽으로 내부의 반란이 없었던 제1사우디 국가 때와는 달리 이맘 투르키 시절부터 내부의 정변으로 리더쉽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는 1827년 그의 먼 친척인 무샤리 빈 압둘라흐만 빈 무샤리가 주도한 쿠데타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했지만, 7년 뒤엔 1834년엔 결국 그의 손에 암살당하고 맙니다. 
무샤리 빈 압둘라흐만 빈 무샤리가 쿠데타에서 승리한 기쁨도 잠시, 새로운 이맘이 된지 몇달 지나지 않아 동부전선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다 아버지의 암살 소식을 듣고 리야드로 회군한 투르키의 아들 파이살 빈 투르키 빈 압둘라 (1785~1865)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제2사우디 국가 시절에 쓰인 병장기들)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쳐 기틀을 닦은 이맘 파이살

오스만 제국은 파이살의 통치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아라비아 반도의 이집트인 통치자인 쿠르쉬드 파샤는 파이살의 라이벌이자 사우드 씨족의 연장자들 중 한 명이었던 칼리드 빈 사우드를 지지했습니다. 파이살은 리야드에서 도망쳐 나와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타밈 씨족의 알 코라이프 왕자들이 있는 곳으로 피신을 떠났다가 다시 리야드로 돌아왔습니다. 1838년 그는 쿠르쉬드 파샤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 결국 카이로도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감금되었던 그는 5년 뒤인 1843년에 다시한번 탈출하여 리야드로 돌아왔습니다.
파이살이 리야드로 돌아왔을 때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것은 이집트인들의 허수아비나 다름없던 칼리드 빈 사우드에 대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압둘라 빈 쑤나이얀이었습니다. 파이살은 압둘라 빈 쑤나이얀을 손쉽게 물리치고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이집트에 유배생활 중이어서 지지세력이 없던 그를 도와준 것은 하일 지방에 있던 라쉬드 씨족이었습니다. 라쉬드 씨족의 압둘라 빈 라쉬드가 파이살의 정권 재탈환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파이살은 그 답례로 압둘라를 하일의 통치자로 임명하고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두 씨족간 애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파이살은 성공적으로 나라를 통치한 후 1865년 사망합니다.
그리고 그의 네 아들인 압둘라, 사우드, 무함마드, 압둘라흐만 (1850~1928)의 내분은 결국 나라를 다시 한번 패망의 길로 이끌게 됩니다. 첫째 압둘라와 셋째 무함마드가 사우드 씨족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제, 그리고 둘째 사우드와 막내 압둘라흐만은 아라비아반도 북동부지역의 베두윈 부족, 아즈만 씨족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나온 친형제입니다.

  

 

(제2사우디 국가 시절의 베두윈 캠프 모습)

 

파이살의 네 아들간의 내분, 그리고 패망의 길로...

파이살은 자신의 후계자를 장남 압둘라로 정하고 군총사령관을 맡기는 한편 커져가는 두 형제간의 마찰을 일부나마 줄이기 위해 차남 사우드를 남부 나즈드에 있는 알카르즈의 주지사로 보내버립니다. 

 

하지만 사우드는 알카르즈에서 그의 모계인 아즈만 씨족의 지지를 받아 강력한 권력기반을 닦으면서 두드러진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면서 그의 명성은 성과나 정치적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장남이란 이유로 후계자가 되었다는 비판을 듣던 압둘라의 명성을 가릴 정도로 성장해 버립니다.

 

1865년 파이살이 사망하고 압둘라가 이맘직을 승계받자마자 야망이 넘치던 사우드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사우드는 리야드를 떠나 동부 알하사 지역의 씨족들 사이에서 지지자를 모아 이복형 압둘라에게 도전했으나 그의 첫 도전은 압둘라와 친동생 무함마드 형제의 힘에 눌리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에 굴복하지 않은 사우드는 오만, 아부다비, 바레인을 통치하던 통치자들의 도움을 받아 1870년 12월 압둘라군을 물리치고 무함마드를 사로잡게 됩니다. 

 

압둘라는 리야드에서 쫓겨났고 사우드는 1871년 5월 자신을 이맘이라 칭하면서 정권을 잡는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정권을 잡자마자 이번엔 그의 사촌인 압둘라 빈 투르키가 일으킨 쿠데타로 쫒겨납니다. 압둘라 빈 투르키가 리야드를 장악했고,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동부지역 부족들에 대한 의존도가 컸던 사우드는 대중들의 지지를 얻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압둘라 빈 투르키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바그다드주를 통치하던 미드하트 파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며, 그 댓가로 미드하트 파샤는 사우드의 아들 압둘아지즈에 의해 무함마드 빈 파이살이 죄수로 갇혀있던 알하사 지역을 쓸어버릴 기회를 갖게 됩니다. 그의 공격에 의해 무함마드는 풀려났고 결과적으로 압둘라 빈 파이살과 무함마드 빈 파이살의 두 형제는 리야드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사우드가 아즈만 씨족의 추종자들과 함께 자신을 몰아냈던 압둘라 빈 투르키를 쫓아내고 1873년 1월 리야드를 재탈환하는 바람에 그들은 무타이르 씨족과 우타이바 씨족이 있는 곳으로 추방당했습니다. 하지만 힘들게 정권을 재탈환한 이맘 사우드는 오랫동안 자리에 있지 못하고 2년 뒤인 1875년 1월 전쟁에서의 부상, 혹은 천연두로 추정되는 사인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사우드의 사후 막내동생 압둘라흐만이 후계자로 간주되었지만, 취임한지 1년도 채되지 않은 1876년 큰형 압둘라에게 리야드를 빼앗기고 퇴위하게 되면서 압둘라는 다시 한번 정권을 잡게 됩니다.

 

1887년 아버지를 무너뜨린 삼촌들에 대한 막연한 적개심에 사로잡혀있던 사우드 빈 파이살의 아들은 압둘라를 생포하게 됩니다. 하일 지역을 다스리던 라쉬드 씨족의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가 압둘라흐만과 맞바꾸는 조건으로 압둘라의 석방을 돕게 됩니다. 압둘라는 하일 지역으로 보내지고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는 압둘라를 리야드의 통치자로 지명합니다.

 

같은해 압둘라흐만은 혁명을 일으켜 리야드를 손에 넣고 지켜내지만, 통치권을 확장시키려던 그의 노력은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압둘라흐만이 1889년 사우드 씨족의 확실한 지도자이자 다시 한번 이맘이 된 후 얼마되지 않아 자카트와 라쉬드 씨족의 지도자 이븐 사브한의 체포를 빌미로 제2사우디 국가를 무너뜨리고 까심 지역과 리야드를 정벌하기로 작정한 무함마드 빈 압둘라 알 라쉬드와의 싸움이 시작되어 결국 1891년 1월 24일 물라이다 전투에서 패하게 되면서 압둘라흐만과 그의 가족은 추방당하고 제2사우드 국가는 망하게 됩니다. 아버지 파이살을 도와준 댓가로 자신들의 국가를 세웠던 라쉬드 씨족이 파이살의 아들 압둘라흐만을 몰아내고 나라를 무너뜨린 것이죠.

 

압둘라흐만과 그의 가족들은 남서부에 있는 사우디 최대의 사막 루브으 알칼리, 바레인을 거쳐 쿠웨이트로 이어지는 유배생활을 하게 되며 11년 뒤인 1902년 다시 리야드를 재탈환하게 되면서 압둘라흐만의 차남이자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건국한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빈 파이살 알 사우드 국왕 (1876년 1월 15일~1953년 11월 9일)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참조: 1. Wikid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