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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둘뱅 2013. 5. 25. 22:05

 

 

(사우디 국립박물관에 있는 제1사우디 국가의 수도 디리야의 풍경사진)

 

사우디 정부가 우상 숭배 및 다신론자들을 없앤다는 명분으로 양대 성지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면서도 정작 성지 유적 보호에는 관심없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2008년 세계 문화유산에 등록한 두 개의 문화유산 목록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슬람 이전 나바테리안 왕국의 유적인 마다인 살레 ([알 울라] 사우디 최초의 세계 유산 마다인 살레는 어떤 곳일까? 참조)이고, 두번째는 바로 위 사진이 보여주고 있는 장소, 바로 알 사우드 씨족의 고향이자, 사우디 왕조의 시발점이 된 디리야 유적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제1사우디 국가의 국기)

 

 

제1사우디 국가의 통치자들

1대 이맘: 무함마드 빈 사우드 (1744~1765)- 제1사우디 국가를 세우기 전에는 디리야 마을을 통치하던 왕자였음 (1726~1744)

2대 이맘: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빈 사우드 (1765~1803)- 오늘날의 이라크 일부까지 세력확장과 성지파괴의 시작

3대 이맘: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빈 사우드 (1803~1814)- 계속 자행한 성지파괴, 그리고 이를 단죄하기 위한 오스만-사우디 전쟁의 시작

4대 이맘: 압둘라 빈 사우드 (1814~1818)- 제1사우디 국가의 멸망, 그리고 당한 비참한 최후

 

사우드 가문의 통치권 확립과 세력 확장, 그리고 악명을 떨치게 된 성지 파괴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무함마드 빈 사우드 사이에 맺어진 디리야 맹약에 따라 제1사우디 국가의 건국과 함께 사우드 가문과 그 동료들은 네즈드를 점령하는 것으로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지배주권을 장악해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영향력을 전방위로 넓혀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쿠웨이트와 오만까지, 남쪽으로는 산악지대인 아시르 지역까지 군사작전을 성공리에 펼치며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편입시키는데 성공합니다.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이끄는 정치적, 군사적인 영향력의 확대와 함께 종교적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은 이슬람 학자들과 일반 신자들에게 이라크, 이집트, 인도, 예멘, 시리아 등에 만연해 있던 다신론적인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한 토론과 학술 작업을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회복하기 위한 지하드에 동참하라는 편지를 배포하며 종교적으로도 지지세력을 확보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군사작전을 진행한 후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1765년 정권을 그의 아들이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사위이기도 한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에게 넘겨준 채 사망합니다.

 

 

 

(사우디 국립박물관에 있는 당시의 무기들)

 

2대 이맘이 된 압둘아지즈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력확장에 나서 리야드부터 시작하여 네즈드 (아라비아 반도의 중심부)로 영향력을 확장시켰으며, 계속되는 군사작전의 성공과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정통적인 접근은 점령한 지역 내에서 엄청난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습니다. 정치군사적, 종교적 운동의 성공과 맞물린 대중들의 지지는 다른 부족들을 통합하는데 결정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압둘아지즈는 아라비아 반도 밖 동쪽으로 영향력을 넓혀가던 끝에 1801년에는 시아파의 성지 카르발라의 지배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합니다. 이듬해인 1802년 그의 군대는 극보수적 이슬람 살라피주의자들이 무덤 위에 묘비를 세우는 것이 다신론자들의 행동으로 여겨 반대한다는 이유로 이라크 나자프에 있던 알리 빈 아부 탈립의 무덤과 카르발라에 있던 이맘 후세인 빈 알리 (사도 무함마드의 손자)의 무덤을 비롯한 수많은 성인들의 묘와 유적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시아파들의 성지에서까지 가서 묘와 유적을 파괴해버린 그들의 행동은 반대세력들의 불만을 키우기에 충분했고, 그 댓가로 압둘아지즈는 1803년 디리야에서 저녁 예배를 이끌던 중 이라크의 아아마라에서 온 한 시아파 무슬림에게 양날 단검으로 암살당합니다.

 

순니파를 대표하는 사우디와 시아파를 대표하는 이란의 오랜 애증의 역사 속에 순니파는 그 갈증의 시작점이었던 사도 무함마드의 손자인 이맘 후세인을 카르발라 참극을 통해 죽인 것으로도 부족해서 사우드 씨족이 그 무덤까지 파괴시켜 버리면서 앙금을 증폭시키는데 한 획을 더한 셈입니다.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사우드 씨족의 후손들이고, 다시 말하면 이란과 사우디의 관계가 좋아질래야 좋아질 수 없는 이유기도 하죠.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3대 이맘이 된 압둘아지즈의 아들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네즈드 지역을 넘어 서부의 헤자즈 지역 (사우디 서부지역)을 그의 지배권 하에 두게 됩니다. 처음으로 젯다 인근에 있는 산악도시로 현재는 왕실의 여름 수도인 타이프를 손에 넣었으며, 뒤이어 양대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는데 성공합니다. 

 

사우드의 통치기는 아라비아 반도 내에 종교적 정화운동의 시기였습니다. 이라크에 있는 성지들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고, 메카에 있는 카바를 깨끗하게 씻어냈으며, 메디나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무덤을 파괴했습니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들은 이슬람을 초기의 단촐했던 원점으로 돌려놓자는 종교적 바램의 구현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메카를 재탈환한 후 그곳의 우상들을 날려버렸던 사도 무함마드의 선례를 따라하는 것일 뿐이라고 느꼈기에 부담없이 부숴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들이 힘을 키우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이슬람의 성지, 유적들은 엄청나게 많았을텐데 말이죠....

 

이러한 종교적 정화운동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모든 무슬림들로부터 환영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이를 반대하는 많은 무슬림들은 사우드 군대의 행동이 극단적이라고 여겼으며, 그런 극단적인 세력들에게 양대 성지가 그렇게 쉽게 넘어갔다는 사실에 멘붕당했다고 하네요. 이들 뿐만 아니라 메카와 메디나를 손에 넣은 것은 1517년 이후 이 지역을 다스려왔던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위협하는 중요한 도전으로 간주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사우디 국립박물관에 있는 제1사우디 국가의 수도 디리야 초기의 미니어처)

 

 

통치권 쇠퇴와 몰락: 오스만-사우디 전쟁 (1811~1818)

 

사우드가 날뛰는 모습이 분통했지만, 유럽에 신경쓰느라 아라비아 반도까지 직접 신경쓸 상황이 아니었던 오스만 제국은 아라비안 반도의 공식적인 통치자라는 자격으로 성지와 유적, 사원들을 파괴하고 다니는 사우드 씨족의 범죄를 응징해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집트의 총독 무함마드 알리 파샤에게 아라비아 반도 내 빼앗긴 영토를 재탈환하고 사우드 씨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라는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지령을 받든 무함마드 알리 파샤는 1811년 홍해를 통해 헤자즈 지역을 침공하면서 제1사우디 국가의 멸망으로 끝나버린 오스만-사우디 전쟁, 또는 이집트-와하비 전쟁이라 불리는 7년간의 전쟁에 돌입합니다.   

 

이집트 군대를 이끌던 무함마드 알리 파샤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가 1812년 히자즈를 재탈환하는데 성공하고 마을을 하나씩 하나씩 점령하고 저항하는 마을은 파괴하는 방식으로 네즈드 지역을 차례차례 손아귀에 넣으며 1813년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메디나의 관문인 얀부에 상륙했을 땐 이미 사우드 씨족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너뜨린 뒤였습니다. 이브라힘 파샤는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사우드 씨족의 정치적 영향력을 빼앗는덴 성공했지만, 본진인 디리야를 함락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들과 사우드 씨족의 본진인 디리야 사이에 가로막고 있는 네즈드 사막을 뚫고 침공하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까요. 

 

한편 이브라힘 파샤의 침공으로 영향력을 잃어가던 와중에 사망한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빈 사우드에 이어 4번째 이맘에 오른 그의 아들 압둘라 빈 사우드는 수적으로도 열세인데다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집트 군대에게 빼앗긴 영토를 재탈환하기는 커녕 자신들을 향해 조여오는 이브라힘 파샤의 군대를 막아내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디리야 침공을 시도하던 이브라힘 파샤는 기어코 1817년 네즈드 사막을 통과하는데 성공하여 몇달 간의 봉쇄 끝에 1818년 초 압둘라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디리야를 점령한 후 그를 포함한 사우드 씨족의 많은 구성원들을 포로로 잡아 이집트를 거쳐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끌고 가버리면서 제1사우디 국가는 멸망합니다. 제1사우디 국가의 멸망과 함께 디리야 유적지는 버려진채 방치되면서 역사의 무대 위에서 퇴장하게 됩니다.

 

 

생포된 압둘라 빈 사우드의 운명,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사우드 씨족의 국가들...

2명의 와하비 지지자들과 콘스탄티노플로 압송된 압둘라 빈 사우드는 성지와 유적 파괴라는 죄명으로 공개 참수형에 처해져서 그의 잘려진 머리는 보스포러스 해협에 버려지게 됩니다. 참수형을 당한 이유는 이맘 후세인 무덤을 비롯한 메카, 메디나에 있던 각종 유적 파괴 등 성지와 모스크에 대한 범죄의 책임자였기 때문입니다.

 

디리야는 파괴되고 이맘 압둘라는 압송되었지만 살아남은 사우드 씨족과 살라피 운동주의자들은 다시 뭉쳐 투르키 빈 압둘라 빈 무함마드를 중심으로 리야드를 재탈환하고 제2사우디 국가 (네즈드 토후국) 세우면서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으로 이어지는 아라비야 반도 내 사우드 씨족의 국가를 이어가는 초석을 다지게 됩니다.

 

 

참조: 1. Wikipedia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