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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둘뱅 2013. 5. 24. 17:45

 

 

(제1사우디 국가의 세력확장도. 오늘날의 UAE, 카타르, 오만, 예멘, 요르단의 전체, 혹은 일부를 자신들의 영토에 편입시키며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1932년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가 건국되기 2세기 전인 1744년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사우드 가문에서 세운 여러 나라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왔습니다. 그 복잡다단하고 기나긴 역사의 시작이 된 디리야 토후국 (Emirate of Diriyah)은 1744년에 세워진 제1사우디 국가 (First Saudi state)로 살라피 이론가이자 개혁-이라 쓰고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복고주의라 읽는다...-을 추진하던 이맘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 (1703~1792)과 오늘날의 리야드 인근 디리야를 통치하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 왕자 (?~1765)가 아라비아 반도 내에 정통 이슬람으로부터 벗어나 우상숭배와 다신교 신앙 등 온갖 이단 사례와 신앙차가 만연하고 있는 오류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내몰기로 결심하고 이슬람의 원류로 돌아가자는데 의기투합하여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디리야는 리야드 북서쪽 외곽에 위치한 마을로 현 사우디 왕실의 고향마을이자 제1사우디 국가의 수도였고, 현재는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고향 마을인 알우이아이나와 함께 행정구역상 리야드주에 속해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복고적 이슬람 원리주의를 외치며 살라피스트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과 세력을 키우고 싶어했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의 의기투합!

1704년 리야드 북서쪽 3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알우이아이나 마을의 아랍 부족인 타밈 씨족 출신의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은 한발리 학파를 따르던 아버지 압둘 와합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이슬람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메카, 메디나부터 이라크의 바스라, 바그다드까지 다니면서 이슬람을 공부하고 1740년 고향 알우이아이나로 돌아왔습니다. 메카와 메디나에서 공부할 땐 성인과 무덤 숭배를 거부하는 등 기존의 가르침에 반하는 이단적인 학생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바스라에서 체류하는 동안 자신의 사상을 정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후 고향을 통치하던 우쓰만 빈 무암마르를 포함한 추종자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며, 그를 따르던 우쓰만 빈 무암마르의 지원에 힘입어 자신이 품어왔던 개혁적인 사상의 일부를 실현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무덤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이븐 무암마르를 설득하여 사도 무함마드의 동료이자 그의 사후 두번째 칼리프가 되었던 우마르 빈 알 캇탑(579~644)의 형제로 마을주민들이 존경해오던 자이드 빈 알 캇탑의 묘를 평탄하게 밀어냈습니다. 이 행동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사우디 국왕이나 왕자들의 무덤도 평소에 누리던 부귀영화에 비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로 단촐합니다. ([정치] 술탄 왕세제의 조촐한 무덤 참조) 둘째, 그는 모든 간통자들을 돌로 쳐죽일 것을 멍령했고, 이 명령은 지역 내에서 관행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알하사와 카티프 지역을 통치하면서 나즈드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오던 부족인 칼리드 씨족를 이끌던 술라이만 빈 무함마드 빈 구라이르의 주목을 끌게 되었고, 지지세력이 늘어나는 것을 경계했던 그는 우쓰만 빈 무암마르에게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을 죽이지 않으면 알하사에 있는 우쓰만의 땅에서 토지세를 못 걷게 하겠다며 협박했습니다. 우쓰만 빈 무암마르는 그 협박에 넘어가지 않았지만,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은 결국 쫓겨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우이아이나 마을에서 쫓겨난 그를 초청한 사람이 바로 1727년부터 인근 마을 디리야 토후국를 통치하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 알무끄린이었습니다.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디리야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아라비안 반도 내에 사는 아랍부족들에게 자신들이 보았던   "진정한" 이슬람의 원칙을 다시 불러오자는 결론을 내리고, 행동에 옮기기로 의기투합합니다. 한 문헌에 따르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아래와 같이  살짝 오글거리는 닭살돋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전해집니다.

 

무함마드 빈 사우드: "이 오아시스는 당신의 것이고, 당신의 적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만약 모든 네즈드의 부족들이 당신을 내쫓기 위해 소환한다고해도, 우리는 당신을 내쫓는데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라의 이름으로 맹세하오!" 그러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화답합니다.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 "당신은 정착민들의 지도자이자 현명한 사람이구려. 나는 당신이 불신자들에 대한 지하드 (성전)를 수행하겠다고 나에게 맹세해주길 원하오. 그 답례로, 당신은 무슬림 공동체를 통치하는 이맘이 되고, 나는 종교적 문제의 지도자가 되겠소!

- 마다위 알 라쉬드, "A History of Saudi Arabia" (2010).
이 닭살 돋는 짧은 대화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사우디 왕조의 시발점이 됩니다.

 

이 두 세력이 실질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에서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에게 내건 두가지 조건은 

"(1)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반드시 디리야에 정착해야 하며, (2) 디리야 토후국의 통치자인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세금을 징수하는 것에 반대하지 않는다" 였습니다. 

 

실질적으로 병력을 제공했던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입장에서는  정착까지는 할 수 있어도 짭짤한 전리품 수입을 세금으로 받친다는 것에 거부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의기투합한 이들의 행동은 1744년의 맹세로 이어지게 되고, 맹세와 함께 무함마드 빈 사우드의 아들 압둘아지즈 빈 무함마드 빈 사우드와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딸을 결혼시키면서 더욱 굳건하게 맺어진 알 사우드 씨족과 알 앗셰이크 씨족의 결혼동맹은 "상호지원 협정"이자 "권력분담 합의"의 형태로 사우디 확장의 사상적 기반이자 원동력이 되었으며,  제1사우디 국가, 제2사우디 국가를 지나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왕국에 이르기까지 300여년 가까운 세월 속에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 사우디를 통치하는 국왕은 알 사우드 가문이, 이슬람 최고 성직자인 그랜드 무프티는 알 앗셰이크 가문이 맡는 형식으로 말이죠.

 

만약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이 알우이아이나 마을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그와 대동단결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재의 사우디가 아닌 다른 나라, 형태, 혹은 이름을 갖고 있게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정치, 군사적 지원세력을 업고 본격적으로 구현되는 와하비즘

의기투합한 이 두사람의 공동노력은 이슬람의 유일신 개념인 타우히드에 입각한 기본 신념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극보수적 학파인 와하비즘으로 구현되고, 많은 살라피스트들은 이것을 광의의 살라피 부흥운동의 시작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오직 알라만을 숭배해야 한다는 원칙 하에 그림이나 조각 등의 형태로 형상화된 성인에 대한 기도, 성지 외에 무덤과 특별한 사원에 대한 순례, 알라 외에 나무, 동굴, 돌에 대해 숭배하는 우상숭배자나 다신교 신봉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같은 관습들을 철저하게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원칙은 제1사우디 국가 건국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와 우상을 숭배하거나 다신교를 신봉하는 무슬림들을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상 숭배와 다신교를 신봉할 빌미를 차단하겠다며 수많은 이슬람 문화 유적지와 성소들을 파괴시켜 버린 것입니다. 95% 이상 파괴하여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은 5%도 채 안 될 정도라고 하니까요. ([종교] 지금까지 남아있는 메카의 역사적인 사원들 참조) 그리고 최근들어 급격하게 변하고 있긴 하지잔 전통적으로 극단적인 남녀간 역할의 차이를 두어 여성들의 사회활동을 억제하고, 최고의 엔터테인먼트 공간이 쇼핑몰에 불과할 정도로 공식적으로는 가장 재미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달리보면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야망이 있었지만 사도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은 아니기 때문에 좀더 부담없이 이런 행동들을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알 사우드 가문이 현재 사우디 국왕의 별칭으로 쓰고 있는 "양대 성지의 수호자"라고 주장할 명분은 사우디 안에 메카와 메디나가 있다는 것 외에는 없거든요. 아무리 사도 무함마드가 혈통에 의한 권력상속을 바라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무함마드가 조상이었다면 그렇게까지 무자비하게 파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도 같기도 하구요. 사실 혈통으로 따지면야 정통성은 사도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요르단 왕실에 있거든요... 그래서 요르단의 정식 명칭이 요르단 하쉬미야 왕국 (Hashemite Kingdom of Jordan). 

 

종교적으로는 내세울 것이 없는 일개 지방 부족장이던 무함마드 빈 사우드가 이슬람 원리주의로의 개혁을 부르짖던 복고주의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을 만난 것은 그야말로 서로 윈윈할 수 있는 절묘한 조합이었다고 봅니다. 무함마드 빈 사우드의 입장에서는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과의 동맹으로 자신에게는 없는 종교적 명분을 얻을 수 있고,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입장에서도 종교적으로 내세울 명분은 있으나, 자신도 만인의 지지를 이끌어낼 정통성 따위는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행동에 옮기기에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는 사도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알 하쉬미야 가문을 만나는 것 보다는 자신을 지켜주고 자신의 뜻을 따라줄 수 있는 부족과 결탁하는 것이 부담이 덜했을테니까요. 하나씩 중요한게 결여된 두 가문이 만나 하나의 완전체가 된 척하는 셈이랄까요... 무언가 명분들은 그럴듯하게 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무슬림들에게 인정받을만한 결정적인 그 무언가가 없죠. 그렇다보니 더더욱 보수적인 종교관과 철권통치로 자신들의 권력을 보호 및 유지해나가는 것이겠지만요.

 

그리고 정치와 종교가 결탁된 결혼동맹을 바탕으로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지원을 받은 무함마드 빈 사우드는 자신이 통치하던 디리야에서 나라 (디리야 토후국)를 세우고 디리야를 벗어나 자신들의 목표를 실천에 옮기기 위한 세력 확장에 들어갑니다.... 

 

 

(2부에서 계속...) 

 

 

출처: 1. Wikidedia / 2. 오마이뉴스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