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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둘뱅 2013. 6. 3. 22:00

 

1918년 제1차 사우디-하쉬미 전쟁을 통해 정통성을 강조하며 눈엣가시였던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 빈 알리를 사실상 궤멸시키고, 1921년 제2차 사우디-라쉬디 전쟁을 통해 하일을 정복하고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네즈드-하사 토후국에 합병시키면서 1891년 제2사우디 국가 멸망부터 맺어온 라쉬드 씨족과 30년간에 걸친 악연을 종식시키며 자신의 최대 라이벌들을 약체화시키거나 무너뜨리는데 성공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국명과 자신의 호칭을 바꾸며 아라비아 반도 통일을 향한 야망을 더욱 불태우게 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1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1) 건국배경

     2부제1사우디 국가 (1744~1818) (2) 건국과 세력확장, 성지파괴, 그리고 멸망

     3부제2사우디 국가 (1818~1891): 내부 분열로 홍역을 앓았던 네즈드 토후국

     4부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5부사우디 통일전쟁 (1) 압둘아지즈의 귀환과 자발 샴마르 토후국 멸망 (1902~1921)

     6부사우디 통일전쟁 (2) 헤자즈 왕국 합병과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1921~1932)

     7부사우디 통일전쟁과 건국의 또다른 주인공, 베두윈들의 종교적 민병대 이크완

 

 

 

3. 네즈드 술탄국 (1921~1926)

 

(네즈드 술탄국의 국기)

 

라쉬드 씨족과 하쉼 씨족의 양대 라이벌들을 물리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1921년 자신이 다스리던 나라를 새롭게 개편하여 자신을 네즈드 지역을 통치하는 술탄으로 칭하고 사우드 씨족이 다스리는 나라의 국명을 네즈드-하사 토후국에서 네즈드 술탄국 (Sultanate of Nejd)으로 변경합니다. 네즈드 술탄국 시기에는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헤자즈를 통치하고 트랜스요르단을 세우려던 하쉼 씨족과의 분쟁을 종식하게 됩니다.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 (1919-1921)과 우까이르 조약 (1922)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은 종전된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일어난 전쟁이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영국이 그들의 통치를 무효화하면서 쿠웨이트를 "영국 보호령 하의 독립 수장국"으로 선언한 것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몰락과 함께 절대권력의 공백상황에서 쿠웨이트 수장국과 리야드 토후국 사이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으며, 그 결과로 네즈드-하사 토후국 시절이던 1919년부터 네즈드 술탄국을 선언한 1921년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전쟁을 쿠웨이트-네즈드 국경분쟁 (Kuwait-Nejd Border War)이라 부릅니다.

 

쿠웨이트-국경분쟁은 쿠웨이트 남부 국경지역의 활용을 놓고 이크완들과 쿠웨이트 수장국 사이에 벌어진 분쟁입니다.

 

1919년 쿠웨이트 수장국의 셰이크 살림 알 무바라크 알 사바흐는 쿠웨이트 남부 국경지역에 상업도시를 건설할 계획을 세우면서 리야드 토후국과 외교분쟁을 야기했으나 영국의 개입으로 계획은 무산되고야 맙니다. 하지만, 1920년 이크완들이 쿠웨이트의 남부 국경지역에 자신들을 위한 마을을 설립하기 시작하자 바로 1년전 상업도시를 개발하려고 했다가 영국의 제지로 실패했던 셰이크 살림은 격분하여 영국에게 자신의 땅에 이크완들이 마을을 세우는 것을 멈추게 해달라고 했지만, 바그다드에 있는 고등판무관은 살림의 요구를 무시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셰이크 살림은 이크완들을 내쫓기 위해 300명을 파견하지만, 그의 시도는 유혈전투로 발전하여 결국 쿠웨이트군이 패하게 됩니다.

 

셰이크 살림은 네즈드-하사 토후국의 숙적이었던 자발 샴마르 토후국에 지원군을 파병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이크완들을 공격하기 위해 다시한번 모든 군사들을 파병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크완들이 이미 전투태세를 갖추고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아챈 쿠웨이트군은 무모한 공격을 시도한 대신 자흐라로 회군하기 시작했고, 4000여명의 이크완 부대는 쿠웨이트 군을 추격하여 1920년 10월 10일 쿠웨이트 시티에서 서쪽으로 40km 떨어져 있으며, 쿠웨이트인들에게는 승리의 땅으로 기억되는 자흐라를 공습하여 200여명이 전사하였습니다. 그런 상황에까지 닥치자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영국군은 1899년 셰이크 살림의 아버지 무바라크 알 사바흐와 영국 간에 체결한 앵글로-쿠웨이트 협정에 근거하여  2척의 전투함 (에스페켈과 로란스), 무장 차량과 2대의 비행기 등을 배치하고 쿠웨이트 수장국을 지원하며 개입할 기미를 보이자 이크완들은 결국 철수하고야 말았습니다.

 

결국 쿠웨이트 남부 국경 인근 5,180km2의 사우디-쿠웨이트 중립지대를 포함한 

네즈드 술탄국과 쿠웨이트 수장국 사이의 국경이 1922년 우까이르 조약 (Uqair Protocol)에 의해 최종 확정됩니다.

 

(리야드 국립박물관에서 본 당대의 장신구들)


이크완의 트랜스 요르단 침공 (1922~1924)1920년대 초 계속된 네즈드로부터 트랜스 요르단 남부지역에 대한 이크완들의 반복된 침입은 그나마 명목을 유지하고 있던 트랜스 요르단의 아미르 압둘라에게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었습니다. 그는 계속되는 이크완들의 침입을 지켜낼 힘도 없었기에 영국군은 암만 근처 마르카에 작은 비행편대 등을 파병하여 트랜스 요르단에 대한 그의 통치권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1919년 제1차 네즈드-헤자즈 전쟁에서 후세인 빈 알리가 패했고, 하쉼 씨족에 의한 대시리아 건국에 실패하면서 영국은 트랜스 요르단과 이라크를 묶어 하쉼 씨족의 왕국을 세우려던 희망이 있었기에 이 있었기에 내외부의 위협으로 트랜스 요르단을 보호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트랜스 요르단의 통치자 아미르 압둘라에 대한 영국의 군사적인 지원은 "요르단인을 위한 요르단"이라는 모토를 걸고 반 영국위임통치, 반 아미르 압둘라 정권을 내건 트랜스 요르단 최초의 반란인 쿠라 반란 (1921)과 훗날 쿠라 지역을 지배하던 셰이크 쿨라입 알 슈라이다에 의해 다시 일어난 반란 (1923)을 억업하는데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1922년 이크완은 약 1,500명의 낙타 기병대가 참전한 가운데 암만을 향한 첫 장거리 침공을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크완의 시도는 트랜스 요르단을 방어하는 영국 공군의 공습에 막혀 두 개의 마을을 완전히 날려버렸을 뿐, 목적지인 암만에는 도달해보지도 못한채 철수하는 와중에도 영국군의 전투차량과 비행기들에게 공략당하면서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1922년부터 2차 암만 침공을 시도하는 1924년에 이르기까지 트랜스 요르단에 대한 이크완의 간헐적인 침공과 약탈은 계속되었습니다. 

 

2년 뒤인 1924년 이크완들은 1차 암만침공 때보다 세 배나 많은 약 4,500명의 낙타 기병대로 네즈드에서 트랜스 요르단을 공격하기 위한 1,600km의 원정길에 올랐습니다. 이크완 낙타 기병대들은 1차 침공 때와 달리 트랜스 요르단의 수도를 향해 깊숙히 진격했으나, 암만을 불과 15km 앞에 두고 영국 공군에 의해 발각되어 그 댓가로 이크완들은 영국 공군으로부터 공습을 받게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이크완 기병대들은 500명 가까운 대원들을 잃는 등 심각한 패배를 당하고 퇴각하게 됩니다. 영국 공군의 지원이 없었다면, 암만은 이크완들의 손에 넘어가 요르단의 역사 또한 다르게 변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크완의 침공은 술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 의해 계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크완들을 억제시키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침공을 묵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헤자즈를 정복하고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이크완의 공적들이 모두 사라지게 되면서 상황은 변하기 시작하여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그간 그와 사전조율하지 않고 좌충우돌해왔던 이크완에 대해 치명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면서 양측은 공개적인 불화를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1927년부터 이크완의 궤멸로 이어지는 양측의 유혈충돌이 발생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됩니다.  

 

(리야드 국립박물관에 서 본 당대의 생활상)


제2차 네즈드-헤자즈 전쟁 (1924~1926): 헤자즈 왕국 정복과 후세인 빈 알리의 탈출

번성하던 네즈드 술탄국과 겨우 연명하던 헤자즈 왕국의 새로운 전쟁은 헤자즈 왕국이 네즈드로부터 성지로 향하는 성지 순례객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1924년 8월 29일 술탄 토후국의 술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헤자즈 왕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일으켜 첫 단계로 타이프를 선제공격하여 별다른 저항없이 접수하는 성공합니다. 타이프를 함락한 네즈드 술탄국 군대와 동맹군 이크완은 메카로 진격하게 됩니다. 네즈드 왕국의 후세인 빈 알리 국왕은 영국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지역내 종교분쟁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영국의 원칙에 따라 거절당합니다. 후세인 빈 알리는 트랜스 요르단의 압둘라 국왕에게도 원조를 청하지만 이 역시 거절당하면서 메카에서 탈출하여 젯다로 피신합니다. 그가 도망감에 따라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메카를 저항없이 개전 한달 반 만인 1924년 10월 13일 접수하는데 성공합니다. 리야드에서 10월 29일 열린 이슬람 총회는 메카에 대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의 관할권을 범이슬람권에 널리 인식시킵니다.

 

네즈드 술탄국의 선제공격과 더불어 젯다를 봉쇄하자 헤자즈 왕국의 군대는 와해되기 시작했습니다. 1925년 12월 12일에는 메디나가 항복했고, 12일 뒤에는 얀부마저 함락되었습니다. 그리고 젯다마저 술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와 그의 군대에게 넘어가 젯다를 통치하던 셰이크 압둘라 알리레자의 중재 하에 헤자즈 왕국의 항복과 안전한 도피에 대해 헤자즈 왕국의 후세인 빈 알리 국왕, 네즈드 술탄국의 술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영국 영사 사이의 협상이 종료된 1926년 1월 8일 네즈드 술탄국 군대가 시내로 진입하고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에서 네즈드 술탄국의 술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가 헤자즈 왕국의 국왕이 되면서 사우드 씨족과 하쉼 씨족의 전쟁도 끝나게 됩니다. 

 

한편 헤자즈 왕국을 통치하던 후세인 빈 알리 국왕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게 패한 후 협상에 따라 사이프러스로 도피하여 자신의 아들 알리 빈 후세인을 헤자즈의 왕이라 선언하긴 했지만, 영토를 잃은 이상 더 이상의 의미없이 사실상 망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쉼 씨족의 다른 친척들은 트랜스 요르단 토후국과 이라크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4. 네즈드 헤자즈 왕국 (1926~1932): 이크완들의 반란과 진압

 

   

 

(네즈드 왕국의 국기 (좌)와 헤자즈 왕국의 국기 (우))

 

네즈드 술탄국의 술탄이자 헤자즈 왕국의 국왕을 겸하게 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헤자즈 국왕이 된 1년 뒤인 1927년 1월 27일 네즈드 술탄국을 네즈드 왕국으로 지위를 격상시키고, 같은 해 5월 20일 젯다 협정에 따라 두 왕국의 주권에 대해 영국의 승인을 받으면서 네즈드-헤자즈 왕국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며 통일을 완성할 때까지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자신이 통치하는 두 나라를 독자적으로 통치하게 됩니다.

 

네즈드-헤자즈 왕국은 영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한 군사지원을 받아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을 위한 팽창정책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1921년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멸망시키면서 라쉬드 씨족을 쫒아내고, 1926년 네즈드 왕국을 통치하던 하쉼 씨족을 몰아내고 합병하여 정치적 라이벌들을 모두 제거하고 신생 연합국 네즈드-헤자즈 왕국의 국왕이 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게 남은 아킬레스건은 바로 자신의 오랜 동맹이었던 비정규군 민병대 이크완이었습니다. 공동의 적이 있었을 때는 든든한 우방이었지만, 공적이 사라진 지금 위에서도 설명했듯 독자적으로 날뛰는 그들을 통제할 필요가 생겼고, 네즈드-헤자즈 왕국의 대부분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에게 반기를 들고 반란을 일으킨 이크완 소탕에 보내게 됩니다.

 

이크완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 포스팅할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리야드 박물관에서 본 당시의 지폐와 동전, 그리고 우표)

 

 

5.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 선포 (1932년 9월 23일)

랜 라이벌인 라쉬드 씨족과 하쉼 씨족을 물리치고, 걸림돌이었던 이크완도 궤멸시켜버리고 네즈드, 헤자즈, 알하사, 까티프 등 주요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여 통일에 성공한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는 1932년 9월 23일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국을 선포하며 1902년 리야드 탈환으로 시작했던 30년간의 통일전쟁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건국을 선포한 이 날은 히즈라력을 따지고 있는 사우디에서 유일하게 서력으로 쉬는 공휴일입니다.

 

 

(다큐멘터리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국왕의 일생- 사우디 통일 2부)

 

 

참조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