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이야기/여러 생각들...

[칼럼] 소통의 중요성: 아랍 왕정들이 아랍의 봄에서 살아남았던 이유?

둘뱅 2014. 4. 22. 13:51

2011년부터 중동 및 북아프리카 지역을 강타한 아랍의 봄 열풍 속에서 공화국임을 내세웠던 독재정권들은 무너졌거나 지리한 내전에 들어간 반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장기 독재정권이라 볼 수 있는 아랍의 8개 왕정 국가들 (사우디, UAE, 카타르, 쿠웨이트, 바레인, 오만, 요르단, 모로코)은 아무 일없이 평탄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곧 수년 내로 몰락할 것이라는 몇몇 서구학자들의 주장을 비웃기라도 하듯 말이죠. 사람사는 것이 항상 이성적으로만 움직이는 것도 아니기에 서로 역사적, 사회적인 배경이 다른 상황임을 고려하지 않고 일관적인 잣대로 다른 사회를 평가하는 건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만... (우리나라의 발전사도 일반적인 이론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예외에 속하듯이 말이죠...)


어떻게 왕정이 살아남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추론들을 합니다. 우선 미국 등의 지원.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의 지원으로 왕정을 유지할 수 있는거 아니냐는 주장은 일견 맞는 이야기지만, 그 어느 아랍국가보다 많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으면서도 무너졌던 이집트의 무바라크 정권에서도 볼 수 있듯 충분한 해답이 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으로 얘기나오는 부유한 왕가. 왕정들이 돈이 많아서 견뎌낸 것 아니냐는 말도 일리는 있지만, 요르단이나 모로코처럼 부유하지는 않지만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은 예가 있기에 충분한 해답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이들 왕정 국가들도 몰락하는 이웃국가들의 교훈을 통해 자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당근책도 펼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변화의 목소리를 받아들여 사회 변화를 추진 중이지만, 변화의 속도는 정부가 정보를 통제했던 예전에 비해 보다 넓은 시각을 가지고 더욱 커진 국민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부족한 것도 사실입니다. 나라님도 가난을 구제해주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심지어 사우디 같은 나라에서도 극빈층을 비롯한 가난한 사람들도 많고, 언론에 크게 노출되지 않을 뿐 반정부세력들은 여전히 정부와 갈등을 벌이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목소리는 아직까지는 여전히 소수에 불과할 뿐 다른 국가들처럼 사회를 전복시킬 만큼 많은 국민들의 합의를 이끌지는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왜 아랍지역의 왕정들은 여전히 견뎌낼 수 있었을까요?


아랍지역의 왕정들이 여전히 건재한 이유는 아직까지는 그 지역의 통치세력으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자신들의 부를 베푼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국가로 탄생한지는 채 100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 이전 씨족 중심의 유목민 생활을 해오던 당시부터 지역 일대를 통치해왔거나 분쟁에서 승리했다는 정통성과 국민들과 직접 소통하는 모습 속에 베풀건 베푸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와 이란의 예에서도 보듯 모든 왕정들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집트 왕정이나 이란 왕정이 무너진 것과 지금껏 살아남은 아랍 왕정의 차이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부의 재환원이라는 측면에서 왕정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달랐다고 킹 파이살 이슬람 연구센터의 수석 연구원인 조세프 케시샨 박사는 설명합니다. 무너진 왕정들은 자신들의 부를 전부 자신들을 위해 착복했다는 국민들의 인식 속에 신뢰를 잃었고, 살아남은 왕정들은 그래도 자신들에게 베풀 줄 안다는 신뢰를 얻은 것이 그 차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감의 형성 여부는 결국 왕정들이 국민들과의 자연스럽게 소통을 해왔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겠죠.


민주주의 국가든 왕정 국가든 누군가에게는 불합리한 요인들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민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이는 왕정에 국민들이 신뢰를 보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에도 그래왔듯 자신들의 생활에 큰 어려움이 없다면 대부분의 국민들에게 정치체제라는 것은 어쩌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넓은 영토에 흩어진 많은 국민들을 상대하기 위해 매일 민원인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사우디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왕국의 정식 아랍어 명칭은 영어 명칭과 달리 "(아라비야 반도를 통일한) 사우드 가문의 아랍왕국"이라는 뜻으로 아랍 왕정국가들 중 유일하게 왕가의 이름을 국가 약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사우디의 경우 현재의 사우드 씨족의 정권이 무너지면 국가명부터 바뀌어야 되는 셈이죠. 사도 무함마드의 직계 혈통임을 강조하기 위해 요르단의 정식 명칭이 "요르단 하쉬미야 왕국"인 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사우디는 사우드 왕가가 아라비아 반도에 세운 세번째 국가이고, 이전 두 국가에 비해선 여러가지 면에서 훨씬 안정적으로 국가를 통치해 오고 있습니다.  ([사우디아라비아왕국 건국사 시리즈] 참조)


사우드 왕가가 아라비야 반도를 통일하고 오늘날의 사우디를 세운 이후 기존의 실패에서 교훈을 삼았던 것은 결국 중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지방 씨족들과의 관계 정립입니다. 엄청나게 복잡해진 후계 구도를 만들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지방 유력 씨족과의 정략 결혼과 건장한 자제들을 국왕 직속 군사조직인 국가방위부로 받아들이고 각 지역의 주지사들에게 지역 국가방위부를 관장하고 신규 인력을 받아들이는 책임을 부여하면서 딴 마음을 품지 못하게 만든 것이죠. 지방 씨족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면서 동시에 대의 기관인 국회가 없는 대신 "공개 모임"을 개최하여 국민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다른 왕정국가들에 비해 교통 편의성이 높지 않은 넓은 통치 지역과 다른 걸프국가의 모든 거주민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은 2천만명이라는 상대적으로 많은 사우디 국민들을 상대하기 위한 방법인 셈이죠.


(리야드 주지사가 민원인들을 상대하고 있다.)


"공개 모임"은 씨족 사회의 전통에서 기인한 것으로 개인이나 가족 사이에 분쟁이 나거나 또는 자신들이 해결불가능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윗사람에게 직접 청원하여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으로 국왕이 있는 왕실 법정, 혹은 각 지역의 주지사나 재외국민의 경우 해당 주재국 대사관에 쪽지를 전하거나 직접 내방하여 자신의 문제를 호소하는 제도로 주지사, 대사 등 해당 책임자들에게는 매일 일정시간 반드시 모임을 개최하여 민원인들을 직접 만날 것을 의무화하고 있습니다. 차례를 기다려서 사안 별로 자문을 구하기에 몇시간씩 기다려야 할 정도로 오래 걸리는 구닥다리 방식이기는 하지만요. 여느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국민의 대변인은 없는 대신 전통적인 방식을 응용한 사회 시스템인 셈입니다. 민원인들의 청원을 받는 주지사나 그 대리인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거나, 자기 선에서 감당하지 못할 경우 최종선인 국왕에게까지 해결을 의뢰하는 역할을 합니다. 


희귀한 질병 등으로 고생하면서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던 사람들이 압둘라 국왕의 지원을 받아 전액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다는 뉴스들이 종종 전해지곤 하는데, 국왕이 일개 개인의 사안을 일일이 어떻게 다 챙길까요? 바로 이런 시스템에 의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풍부한 통치자금을 활용하는 것이죠. 점진적인, 그러나 태생부터 보수적인 종교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사우디 상황을 감안하면 나름 과감한, 일련의 개혁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압둘라 국왕은 아랍의 봄 이후 공개 모임을 통한 대민접촉을 강화하라는 지침을 내렸을 정도로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국민들을 신경쓰지 못하면 정권의 안정도 없다는 당위성에서 나온 선택이겠지만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지도자들이 적극적인 소통에 나서는 UAE

최근 제 지인 중 한 명이 아부다비에서 한 식당에 갔다가 수행 경호원 한 명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하고 있는 아부다비의 무함마드 왕세제를 만나 줄서서 기다려서 사진을 찍었다고 자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사우디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적은 UAE의 경우 사우디 같은 시스템은 없지만 작은 나라의 이점을 살려 두바이 통치자 무함마드나 그의 아들인 타밈 왕세자, 아부다비의 무함마드 왕세제 등 왕실 고위인사들이 신변 잡기부터 새로운 정책 발표까지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소통하고 셰이크 무함마드의 개인 집무실이 에미레이트 타워에 있는 것처럼 일상생활의 가까운 곳에서 일반인들을 접하는 소식을 종종 접하곤 합니다. 다른 국가들에 비해 일반 대중들과 친근한 스킨쉽을 강조하는 것이죠.


(두바이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 근로자 일행과 만나 시간을 보낸 셰이크 무함마드와 딸/ 출처: 셰이크 무함마드 트위터)


사우디와 달리 아부다비와 두바이의 경우 국민들에게 첨단 기술을 적절히 활용한 정부의 투명화와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단계적으로 실천에 옮기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만족도를 높여주고 있습니다. 드론을 이용한 무인 공공 서류 배달 서비스나 두바이 크릭 현황 감시, 신분증의 현금카드 겸용화 등에서도 볼 수 있듯 쇼맨쉽이 강한 방법이긴 하지만, 일부에선 우리보다도 오히려 더 첨단 방식을 도입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사회] UAE정부, 무인 드론 쿼드콥터를 이용한 정부서류 배달서비스 계획 발표! & [경제] 신분증으로 현금인출을? UAE의 알힐랄 은행, 신분증 현금인출 서비스 제공 발표! 참조) 시스템화를 통해 정부의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도 꾸준히 추진해오고 있습니다. UAE 정부가 이미 1년전부터 전자정부를 넘어 모바일 전자정부 도입을 준비하고 있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 UAE와 사우디의 전자정부는 의외로 우리보다 좀더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죠. ([IT] 우리와 비슷하거나 의외로 높은 평가를 받는 사우디와 UAE 전자정부 참조) 


이와 더불어 통치자들의 개인 자금도 국민들을 위한 통치자금으로 사용합니다.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국민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한다거나 형식상 저리 대출의 방식으로 자금을 대주지만 실제로 갚을 의무가 없는 방식으로 말이죠. 지난 달 셰이크 칼리파 대통령이 자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 정책의 일환으로 집이 낡아 보수가 필요한 에미레이트인 602 가구에 대해 전액무료로 집을 보수하거나 재건축할 것을 명령했던 것이 한 예입니다. 이런 비용이 결국 개인자금에서 나오는 것이니 말이죠.



소탈한 모습을 보여주는 요르단의 통치자

위의 두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해서 왕실이 국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요르단 왕실도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부유한 걸프국가에 비해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수수한 생활과 격의없이 국민들을 대하는 스킨쉽으로 친근감을 높인달까요. 지난 겨울 폭설이 내린 암만에서 운전하고 지나가다 눈에 빠진 차량을 빼기 위해 사람들과 힘을 합친 후 제 갈길을 가는 압둘라 2세 국왕이 보여준 행동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람들을 도와 눈에 빠진 차를 빼는데 도와주고 자신의 길을 가는 압둘라 2세 국왕의 모습)


시민들을 자연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연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 주변의 정치인들을 통해서도 종종 확인하곤 합니다. 그게 비록 쇼맨쉽일지라도 성품이 타고나지 않았거나 기본적인 소양이 갖춰져있지 않으면 어딘가 어색해 보이거나 위압적으로 보이는 것을 감추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죠. 선출직 정치인들도 결국 자신들을 뽑아준 국민들을 오만하게 대하고 하찮게 여기는 마당에 엄마 뱃속에서부터 왕자로 태어나서 왕가에서 자란 이들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소양교육을 받았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런 교육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자녀들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본 적이 있죠. 비록 힘들게 살지라도 국민들은 이런 모습에서 보이는 진정성을 높이 산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통치자들의 모습이 국민들에게 아직까지 많은 지지를 받고 있기에 몇몇 공화국들이 무너진 아랍의 봄 열풍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들 왕정이 완전체도 아닌데다 불합리한 모순덩어리인 면들도 있지만, 통치자들의 소통 시도와 친밀한 스킨쉽은 비록 낡은 방식이거나 쇼맨쉽이라 볼 수 있을 지언정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는데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사우디의 내셔널 데이 (9월 23일)가 공식 국정 공휴일로 지정된지 불과 몇 년되지 않았고, 젊은이들에게 국가 정체성을 확립시키겠다며 올해부터 의무 병역제를 도입한 UAE와 카타르에서 볼 수 있듯 아직까지 이들 국가들은 유목 생활이 익숙한 씨족 중심의 사회에서 국가 중심의 사회로 바뀌어가는 과도기적인 과정에 있으니까요.


아랍 왕정들이 달라진 사회적 개혁 요구에 적절히 대처하여 정권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아니면 결국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질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절한 비전 제시와 자국민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은 발전되었다고 자부해 온 이면에 숨겨져왔던 우리 사회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요즘들어 아랍 왕정들이 어떤 면에서 좋아보이는 이유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