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CC/사우디

[인물] 사우디를 움직이는 권좌 뒤의 실세, 압둘라 국왕의 최측근이자 왕실법원장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둘뱅 2014. 5. 21. 14:35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사우디 왕실법원장. 출처: 트위터 공식 계정 프로필 사진)



현정권의 진정한 실세임을 드러내듯 내각이 총사퇴하는 대대적인 내각 개편 중에도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유임될 것 같다는 소식이 흘러나오면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즘 사우디 정치관련 소식을 접하다 보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사우디 왕실법원장입니다.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의 공통점은 통치자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비서실장이지만, 단순한 비서실장이 아닌 진정한 실세라는 평가 속에 많은 적대세력을 두고 있다는 점이고, 김기춘 비서실장이 사회를 유신시대로 회귀시키는데 앞장서고 있으며 여러 정치적 사건들을 통해 일반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인 반면,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은 201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압둘라 국왕의 개혁정책의 배후에 있는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을 뿐, 상대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이 극명한 차이점입니다. 


여권 신장 등 최근 이어지는 일련의 사회개혁정책 외에도 올해들어 이어지고 있는 무끄린 왕자의 부왕세제 지명, 반다르 왕자의 정보국장 사임, 압둘라 국왕의 아들인 국가방위부 장관 무타입 왕자의 위상 강화 및 투르키 빈 압둘라 왕자의 리야드 주지사 임명 등 압둘라 국왕의 친정체제를 강화하는 사우디 왕실 내 권력구도 재편 과정에서도 한결같이 언급될 정도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요한 인물입니다. 압둘라 국왕의 충직한 개인비서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은 어떤 인물일까요?


칼리드 빈 압둘아지즈 빈 압둘무흐신 알 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은 사우디를 창건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측근이자 평생의 동료였으며 다양한 공직에서 근무했던 셰이크 압둘아지즈 빈 압둘무흐신 알 투와이지리 (1918~2007)의 아들로 아버지의 고향인 사우디 중부 나즈드 지역에 있는 수다이르에서 196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리야드 킹 사우드 대학 법대 1회 졸업생이었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정치학 석사와 리야드 나이프 아랍 안보대학 (Naif Arab University for Security Sciences) 이슬람 형법 석사가 되었으며, 서로 다른 23개 전문과정을 익혔는데 가장 중요하게 익혔던 것은 고급 리더쉽 과정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국가방위군의 7급 법률 연구원으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법률 고문까지 진급하였으며, 사우디 국가방위군 미국 사무소에서도 근무했었습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헤지라력 1410년 (1989~1990년 사이) 국가방위군에서 왕세제실 산하 전문연구센터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겨 압둘라 국왕이 왕세제였던 시절 컨설턴트와 특별 보좌관으로 근무한 후 왕세제실 부실장과 개인 보좌관으로 승진하며 출세가도를 달렸습니다. 그 후 칙령을 통해 왕실법원장 겸 국왕 특별보좌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왕위 계승문제를 담당하는 충성위원회 사무총장에 지명되어 무타입 왕자가 부사령관이었던 국가방위군의 발전에도 기여했고, 이는 압둘라 국왕 부자와의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고 무타입 왕자의 입지를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에는 국가방위군의 감독관과 상설 위원회 위원장에 지명되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6월 26일 압둘라 국왕은 칙령을 자신이 겸임하고 있는 총리실을 왕실법원과 합병하고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 왕실법원장의 지위를 장관급으로 격상시키는 한편, 압둘라 국왕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하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개혁정책 추진과정에서 그의 목소리를 더 반영할 수 있는 자격과 지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사우디 정치에서 높아질대로 높아진 그의 위상에 걸맞게 그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많은 정적들이 있습니다. 압둘라 국왕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왕실 내 인사들과 보수적인 종교세력들이 그들입니다. 


왕실 내에서 압둘라 국왕은 소수 세력으로 국왕이 되기까지 왕실 내에서 많은 정치적 투쟁을 견뎌왔습니다. 그가 압둘아지즈 국왕의 아들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7세에 메카 주지사로 첫 관직을 얻었을 정도로 정계 진입이 늦어진 이유 중 하나는 압둘라 국왕 자신의 모계 때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로 왕실 내에서 소수 세력이었습니다. 6세에 사망한 압둘라 국왕의 생모인 파흐다 빈트 알 아시 알 슈라임 왕비는 사우디 씨족의 오랜 라이벌이자 정적이었던 라쉬드 씨족의 일원이었거든요. 라쉬드 씨족은 사우디 씨족과 오랜 애증관계를 맺어온 라이벌 씨족으로 자발 샴마르 토후국을 세워 제2사우디 왕국을 멸망시켰다가 압둘아지즈 국왕에 의해 궤멸당한 경쟁 씨족이었습니다. ([역사] 자발 샴마르 토후국 (1836~1921): 사우드 씨족에 맞서다 굴복한 라쉬드 씨족의 국가 참조) 압둘라 국왕은 39세가 되던 1963년 국가방위군 사령관이 되면서 오늘날 국왕에 오르는 정치적 기반을 쌓게 되며 1975년 3월 칼리드 전 국왕에 의해 제2부총리로 지명되면서 왕실 내에서 입지가 급부상한 그를 탐탁치 않게 여기는 왕실 내 가장 강력한 파벌인 수다이리 세븐을 비롯한 여러 왕실 인사들과 권력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제2부총리가 되고 싶으면 국가방위군 사령관 자리를 내놓으라는 압박과 함께 말이죠. 압둘라 국왕은 그 압박을 견뎌내어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왕실 내 지지세력이 많지 않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정치력을 극대화하고 우호세력을 넓히기 위해 충실하고 명석한 참모를 필요로 했을 것으로 보이며, 자신이 데리고 있던 국가방위군의 부하직원들 중 눈에 띈 칼리드 알 투와이지리에게 많은 힘을 실어줬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압둘라 국왕이 즉위 후 보수적인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젊은이들을 적극적으로 해외유학을 보내 최신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이게 하고, 남녀가 한 공간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과학기술대학을 세우면서 이를 반대하는 종교세력들을 쳐내는 등 사우디 사회에 점점 확산되고 있는 개혁정책은 보수적인 종교세력들로서는 정말 보기 힘든 일일 것입니다. 특히, 장관급 왕실법원장으로 격상된 이후 더욱 확대되고 있는 여성들의 사회진출과 운전금지조치를 해제시켜달라는 목소리가 기존에 비해 더욱 증폭되서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는 것들 역시 결국 젊은 세대들을 해외로 보내 경험하게 된 결과물이니까요.


압둘라 국왕을 충실히 보좌하면서도 전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그의 존재가 주목을 받게된 건 지난 3월 21일 2012년 계정을 개설해놓고도 단 한 번도 메세지를 남기지 않았던 자신의 트윗 계정에 메시지를 남겨 해결되지 않는 특정 사항에 대해 불편을 호소하고 싶거나 문제가 있다면 자신에게 직접 메세지를 남겨달라는 내용의 트윗 메세지를 남기면서부터였습니다. 트윗을 통해 왕실법원에 직접 가지 못하는 민원인들의 민원이 늘고, 이를 통해 해결된 문제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주목을 끌기 시작한 끝에 왕실법원은 결국 5월초 사우디 국민들이 압둘라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남길 수 있는 전용 핫라인 사이트인 타와솔 (Tawasol)을 개설하였으며, ([정치] 사우디 왕실법원, 국왕에게 직접 청원할 수 있는 온라인 핫라인 개설! 참조) 타와솔의 기능을 좀더 확장하여 다양한 민원과 의견제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왕실법원 공식 홈페이지 e-Diwan (디완)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참조: "خالد التويجري"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