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 이야기/아랍의 이모저모

[문화] 아랍음악의 이해 (03) 아랍음악의 역사와 이론적인 면들

둘뱅 2006. 1. 13. 11:21
   예전 언제쯤인가 음악에 관심이 있어 이런저런 자료를 정리해서 만들어 보았던 것입니다... 음악사나 종교적인 면 등 주로 이론적인 글이며 4~5번에 걸쳐 나눠 실을 예정입니다... 아울러 이 연재가 끝나면 오늘날의 대표적인 아랍가수들을 2명 정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지난 호에 이어서 이번 호는 아랍음악의 역사와 이론적인 면들에 설명이 이어집니다....



3. 아랍음악의 역사와 이론적인 면들

1) 아랍음악의 역사

(1) 정통 칼리프 시대(622∼661) 
   이 시기, 특히 마지막 두 명의 정통 칼리프 시대 음악활동의 중심지는 메디나였다. 이슬람이 태동한지 얼마되지 않았던 이 당시엔 음악에 대한 이슬람 성직자들의 부정적이며 비판적인 시각에도 불구하고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부호나 귀족의 지원을 받아 전문 음악인들이 꾸준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중요 전문 음악인들은 페르시아 출신의 해방노예였다. 이들 페르시아 출신의 대표적인 전문 음악인들로는 Tuwais(??∼710)나 사제지간이었던 Khathīr(??∼683)와 Nashīt(??∼??) 등을 들 수 있다. 따라서 중요 음악인들이 페르시아인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메디나에는 페르시아 음악이 유행할 수 있었다. 또한 아랍 출신의 여류 음악가인 'Azza al-Mayla(??∼705)의 집은 당대의 유명했던 많은 문학가와 음악인들이 드나들어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논할 수 있는 고급 살롱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 시기의 음악형식은 일부 리듬음악의 양식이 형태를 이루어나가기 시작했고, 가장 대표적인 노래는 al-ghinā' al-mutqan이라 불렀다.

(2) 우마이야 왕조 시대(661∼750)
   이 시기의 음악적 중심지는 새로 천도한 수도 다마스커스였다. 정통 칼리프 시대가 붕괴되고 우마이야조의 태동, 다마스커스로의 천도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예전 시기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력한 종교적인 유대감이나 神政적 결속력이 떨어지면서 종교적인 면의 지배력이 약해져 이들에 규제를 받았던 이전보다도 음악은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이 당시의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아 음악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으며, 음악 자체에 대한 정열이 대단했었다는 사실도 음악활동이 더욱 활발해져 음악인들의 사회적인 위치가 상승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이에 편승하여 실제적으로 음악은 많은 아마추어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나갔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음악인들로는 '4대 가수'를 꼽을 수 있는데, '4대 가수'로는 Ibn Misjah, 페르시아 해방노예의 아들인 Ibn Muhrīz(??∼715), 투르크 노예의 아들인 Ibn surayj(634∼726)과 버버 노예가문 출신의 al-Gharīd(??∼724)를 꼽는다. 그 외에는 흑인의 아들 Ma'bad와 여자가수로 이름을 날렸던 Jamilā(??∼720)가 있었다.

(3) 전기 압바시야 왕조 시대(750∼945)
   이슬람 음악의 세 번째 시기는 우마이야조를 몰아내고 새롭게 등장한 압바스조가 수도를 이전의 다마스커스에서 바그다드로 옮기면서부터 시작된다. 바그다드는 중근동 지역에 세워진 다인종국가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이전보다 훨씬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그후 약 2세기 동안 이슬람 음악의 중심지가 되어 황금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칼리프의 총애를 받았던 음악인들은 문화생활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으며, 고도의 교양을 갖추어야만 했다. 따라서 음악 자체도 고도로 정교하게 발달하여 이러한 분위기에서 음악에 관한 다양한 저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를 통해 멜로디와 리듬의 양식들이 각각 하나의 양식으로 분명하게 규정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론은 더욱 자세히 발달되었다. 또한, 비약적인 악기의 발달은 연주의 수준을 향상시켰다. 이전부터 이어져 오던 고대의 음악
형태는 좀더 정교하게 다듬어지고, 여러 문화권을 대표하는 음악 형태들이 융합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 당시의 대표적인 음악가들로는 Siyyāt, Zalzāl, Mukhāriq, 'Allūya, Amīr ibn Bānā 등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유명한 여자가수로는 Basbas, 'Ubayda, Shariyya, Danānīr, Mahbūba 등이 있었다.

(4) 후기 압바시야 왕조 시대(945∼1258)
   전기 압바시야 왕조 시대까지 하나의 형태로 유지되어 오던 이슬람 왕조는 945년을 기점으로 여러 국가로 나뉘어지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는 혼란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세력을 대표하는 십자군들의 원정(1095) 이전 시기가 네 번째 시대에 해당하는데, 이 당시엔 아랍지역 자체보다는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교류가 있어 왔던 스페인 무슬림들의 음악을 대표적인 음악으로 볼 수 있다.

 
   스페인 무슬림들의 음악은 아랍 무슬림들의 음악과는 또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는 창시자인 Ziryāb이 스승인 이스학 알 마우실리와의 치열한 경쟁에서 밀려 821년에 스페인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뛰어난 예술가이자 폭넓은 교양과 놀라운 기억력을 갖추었던 지르얍은 자신의 스승에 대한 우월함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 4현이었던 우드에 5번째 현을 첨가하였고, 또한 음악 교육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들을 도입하였다.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스페인에서 계속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스페인의 토착 비시고트 문화와 버버 문화, 그리고 명색을 꾸준히 이어오던 우마이야의 전통이 결합된 독특한 선법과 음악적 형태가 나오게 되었다.

(5) 이슬람 왕조 붕괴기(11C∼19C)
   이 시기는 맘룩국가, 오스만 왕조시대, 아랍의 서구 식민지화 시대 등을 포함하는 아주 긴 시기로 정치적으로는 칼리프 체제의 쇠퇴와 붕괴(1258)를 거친 뒤, 이슬람권이 여러 독립국가들로 분열되는 시기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거의 단절되지 않고 그 맥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전기 압바시야 왕조 시대와 같은 넉넉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하나의 구심점 없이 나뉘어졌다는 사실은 음악가들에게 있어선 하나의 장점이 될 수 있었다. 이슬람 전지역을 지배하는 전제 군주가 사라진 후 각 지역마다 위치한 궁정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소왕국의 군주들이 지역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음악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또한 전제국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마다 왕국이 난립하는 상황은 지역색을 더욱 강하게 나타내어 매우 다양한 음악들이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을 제공해 주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흥미로운 사실은 비아랍지역-터키와 이란과 같은-에서는 신비주의 교단이 예술음악의 발전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서 음악을 장려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이 대중에 가까이 가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에 음악 문화가 일반에게 더욱 뿌리깊게 확산되는 데 필요한 분위기를 제공해 주었다.

(6)오늘날(20C)의 음악
   이 시기는 정치적으로 서구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각각의 독립국가로 존재하게 되는 시기를 말한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라크 등은 과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아랍지역 전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이고 있으며 각 국가별로 이슬람화, 서구화, 둘 사이의 융합화 등 내부사정에 따라 여느때보다도 혼란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날의 음악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이슬람 전통을 재발견하고 재생, 부흥시키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 음악의 접촉을 통해 이슬람적인 서구화를 이루려는 움직임이다. 서구 음악은 1826년 터키를 통해 처음으로 도입되어 이집트와 이란을 통해 널리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음악가들이 초청되어 아랍 토착 음악인들에게 군대음악과 같은 것들을 가르쳤으며 서구의 악보, 악기와 교육 방법, 그리고 오페라, 오페레타와 같은 형식들도 들여왔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서도 이슬람의 전통 음악들도 그 명맥을 끊기지 않고 그대로 전해져 내려와 특히 대중음악은 거의 서구 음악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과거의 비가(悲歌)조의 특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이슬람 전통문화의 고수는 과거의 이슬람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의 확대와도 그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학자와 음악인들은 이슬람 음악의 고유한 뿌리를 탐구하기 시작하여 1932년에는 '아랍음악학회'라는 모임이 카이로에서 열리기도 하였다. 이 모임에 참석한 유럽과 중동의 학자들은 이슬람 음악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을 정의하고, 또 그것을 계속 살리고 발전시키기 위한 방법을 논의하였다. 또한 그 모임 이후로도 새로운 환경에 의한 변화의 과정은 소리를 내는 형태, 음악언어, 음악을 가르치고 연주하는 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2) 종교와 음악
   종교, 특히 이슬람에 있어서 음악의 역할은 이슬람의 탄생에서 오늘날까지 항상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음악이란 종교적으로 잘 활용하면 종교를 인민들에게 보다 쉽게 전파시키는데 도움을 주지만, 자칫 그 기능이 경건함에서 벗어나 쾌락을 추구하게 될 때는 오히려 종교의 전파에 많은 해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 초기의 종교 지도층들은 음악을 반대했다. 다시 말해 새롭게 등장한 '새로운 음악'은 경건함에서 벗어나 점점 더 쾌락적인 생활과 사치에 대한 취미로 이어져 여자들이 참가하고 춤이 가미되기 시작하였으며 거기에 금기시하는 술까지 연관됨으로써, 음악은 곧 경박함과 감각주의를 의미하는 것처럼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 지도층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점점 확대되어 성스러운 도시인 메카와 메디나 같은 곳들도 종교의 중심지가 아닌 오락의 중심지라는 평판까지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종교음악과 세속음악 사이를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쉬운 것도 아니다. 이는 종교음악 그 자체도 오랜 역사를 통해 예술음악과 대중음악 사이를 오고 갔던 탓이다. 음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논쟁의 과정 속에서 지적된 이야기 중에는 일찍이 무함마드가 대중음악은 허용하였으나 예술음악에 대해서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예술음악이 소멸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음악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예술음악측이나 대중음악측은 신학적, 철학적인 차원에서의 근거를 획득하기 위해 {쿠란}과 {언행록}을 비롯하여 종교 지도자들이 쓴 글들, 신비주의자들의 견해, 법적인 판례 등을 그 근원으로 삼았다. {쿠란}에서는 어느 쪽이 옳은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 놓지 않았기 때문에 {언행록}이 논쟁 당사자들이 찾고자 하는 주된 논거가 되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원문의 뜻을 문자적이 아닌 논증과 유추의 방법을 통해 해석하였고 Al-Ghazāli(??∼1111)는 바로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종교학의 부활}이라는 저서를 통해 음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여러 이슬람학파들 중에 좀더 대중들에게 접근해 세력을 넓혀 가던 신비주의자들은 이를 위해 음악을 높이 평가하며 디크르(dhikr)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비주의 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 장르를 우리들은 흔히 '사마'라고 부른다. 이것은 대체로 음악을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과도함을 경계하였고, 또 춤과 악기의 사용에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런 탓에 동일한 전통을 잇는 작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예로 {악기연주의 경청을 허용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라는 글을 쓴 'Abd al-Ghanī an-Nābulsī(??∼1731)를 들 수 있다. 그의 저술은 후대의 한 작가에 의해 비판을 받았는데, 그 작가는 다시 Muhammad ad-Dāmūnī(??∼1800)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종교지도층과 법학자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음악에 대해 글을 쓰는 일반 작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글을 쓴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Ibn 'Abd Rabbini(329∼940), al-Ibshīhī(??∼1446), an-Nuwayrī(??∼1332), Ibn Khaldūn(??∼1406) 등을 들 수 있다.

   종교적으로 음악을 사용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오랜 기간 격렬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이것은 무엇보다도 크게 세 가지, 즉 {쿠란}의 낭송, 기도하라고 알리는 외침, 특별한 축제에 사용하는 찬가 등을 들 수 있다.

   {쿠란}을 곡조에 맞추어 낭송하는 전통은 7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전통은 유대교나 기독교의 음악적인 전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고 차라리 이슬람 출현 이전에 시를 낭송하는 데서 유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목적은 문장의 의미를 고양시키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전달시키려는 데 있었다. 이 점에 관해 서술한 글들은 규칙들을 정하였으며, 그것은 낭송하는 사람들에게 성스러운 경전을 어떻게 읽어야 신자들이 잘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지, 또 잘못 낭송함으로써 오해를 낳아 이단으로 빠지는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다. 거기에는 어떤 음을 강조하거나 늘이는 것, 혹은 멈추는 것과 정확하게 발음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읽는 속도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천천히 엄숙하게 하는 방법, 빠르게 읽는 방법, 그리고 그 중간 정도로 읽는 방법 등이 있었다. 이러한 낭송법이 예술음악과는 무관하디는 지적도 적지 않을뿐더러 사실 이론상으로는 음악의 한 부분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예술음악의 여러 요소들이 거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어떤 지방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낭송되기도 하였지만, 화려한 기법과 악기의 사용이 금지된다는 기본적인 특징을 공유하기도 하였다.

  기도를 알리는 외침(adhān)의 전통은 622∼624년 무함마드에 의해 정해졌다. 훗날 터키와 아프리카의 무에진 길드의 수호성자가 된 최초의 무에진은 해방노예였던 빌랄(Bilal)이었으며, 그의 순교는 오늘날의 연극과 영화에서도 자주 다루어지는 소재 중의 하나이다. 기도의 외침은 모두 7행의 텍스트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12개의 음악적인 소절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리듬은 비교적 자유로우며 멜로디도 지방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마그리브에서는 단순하고 중동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장식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대중음악의 일반적인 특징으로 보았던 것처럼 '열린' 악구와 '닫힌' 악구의 원칙에 따라 낭송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리듬의 전개는 전체적으로는 일종의 곡선과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12소절 가운데 7번째 소절에서 가장 높은 음에 도달한다. 외침은 하루에 다섯 번씩 힘차고 표현력이 풍부한 목소리로 낭송된다. 때때로 경우에 따라서는 몇 소절이 더 첨가되기도 한다. 오늘날의 외침은 첨탑 꼭대기에서 무에진이 직접 육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이크를 이용해서 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축제가 벌어지는 날에도 음악이 활용된다. 라마단 달의 밤에는 파자지야트(fazzāziyyāt)라는 음악을 들을 수 있고, 예언자의 탄신일(mawlid)에는 그의 탄생과 생애를 설명하는 찬가를 듣게 된다. 아랍의 각 지역마다 성자들을 찬양하기 위한 장르들이 개발되었는데, 후세인과 하산의 순교를 추모하기 위해 이란과 이라크에서는 무하람달 제10일에 수난극을 행해 왔다.

   그러면 이와 관련해서 풍부한 성가들을 갖고 이슬람과 많은 공통점을 나타내는 기독교와 유대교의 종교음악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들 세 종교의 음악에는 서로 구별되는 요소들이 있고, 또 유대교의 테아밈이나 비잔틴 전통을 잇고 있는 기독교의 옥토에코스와 같은 선법체게는 이슬람 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세속적인 예술음악이 종교적인 찬가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고, 특히 성스러운 경전을 운율에 맞춰 낭독하는 경우에 그러하다는 점은 이슬람의 경우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경전의 낭송자들이 직접적인 음악가였다는 사실에 기인하기도 할 것이다.

   보다 개인적인 면을 중시했던 신비주의 교단에서 음악은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으며 사마, 즉 음악을 듣는 의식이 빠지지 않고 언급되었다. Abū Sulaymān ad-Dārānī(??∼820?)는 "사마는 이미 마음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 낸다"라고 하였으며 al-Hujwīrī는 "사마는 마치 태양과 같아서 모든 사물에 똑같이 빛을 주지만 그 사물의 위치에 따라 영향을 달리 받는 것과 같다. 그것은 불타고 빛을 주며 사라진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언급들은 신비주의 저술 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음악'이라는 말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고 또 그 요소들에 관해서도 논의되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나 '듣는 것'이 문제였으며 여기에는 춤을 추고 음악에 참여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음성과 몸짓과 악기는 모두 구도자로 하여금 정신적인 수련 과정에서 황홀경에 이르게 하고 신과 최고의 합일을 이루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었다. 메블레비 교단의 창시자인 잘랄 앗 딘 루미는 "사마는 영혼으로 하여금 사랑을 발견하고 그때 전율을 느끼게 하며, 신의 존재 앞에서 베일을 벗기는 영혼의 장신구"라고 말했다.

   모든 교단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디크르 의식 속에서 사마가 가장 잘 표현되었다. 지고의 존재로 향하는 '단계'들은 잘 정돈된 음악적 구성으로 표시되었고, 메블레비 교단의 에인 샤리프('Ayn Sharīf) 예식은 그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로 보여주고 있다. 에인 샤리프는 하나의 예술음악으로서 Mustafā Dede(1610∼1675), Mustafā 'Itrī(1640∼1711), 'Alī Sīrajānī(??∼1714)와 같은 작곡가들이 만든 작품들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가수뿐만 아니라 피리와 북, 현악기와 목이 긴 류트 등의 앙상블도 참여하였다. 이와 같이 예술음악과 신비주의와의 결합은 이란의 교단들에게도 엿보인다. 그러나 악기 사용을 거부하거나 단지 타악기에만 만족하는 교단들도 많이 있다. 이 경우는 보다 대중음악에 가깝게 접근하기 위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알라의 이름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다가 짧은소리로 '알'과 '라'를 반복한다.


3) 아랍음악의 이론과 실제

   9세기 압바시야 왕조가 들어서면서 음악가, 작가, 철학자들은 이슬람 음악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칼리프의 총애를 받으면서 음악 자체에만 신경을 The을 수 있었던 그들은 연구를 시작했으나 기존의 음악에 대한 역사적 문헌이 부재했기 때문에 전설이나 그 외의 분명하지 않은 전승들을 따르기도 하였다. 음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훗날 많은 양의 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음악 연구의 한 측면이 되었다.

   이슬람의 영역이 점점 확대되어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의 사회에서는 초창기의 종교 중심적인 지식이 아닌 모든 종류의 지식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음악에 관한 공부도 교양이 있는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백과사전적인 지식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이었고, 이러한 경향이 10세기경에는 절정을 이루었다. 물론 음악가들도 단순한 음악인이 아니라 종합적인 교양을 갖춘 종합 예술인이 되어야 했다. al-Fārābī(??∼950)와 같은 아랍의 이론가는 그의 저서 {Kitāb al-Musīqī al-Kabīr}에서 "이론은 실제가 가장 높은 단계의 성취를 이룩하기 전에는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하였는데, 그의 시대에 있어서는 확실히 옳은 말이었다.

   음악이론은 이에 관한 그리스의 저작들이 8세기 후반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그리스의 문헌들이 칼리프 알 마문에 의해 수집되어 두 언어에 모두 능통한 기독교도에 의해 번역되기 시작하였다. 이렇나 지식을 최초로 잘 활용한 인물이 '아랍의 철학자'로 알려진 알 킨디였다. 그는 음악에 관한 13편의 저서를 저술했고 아랍의 음악학에 보이는 두 가지 경향을 처음으로 지적하였는데, 그 자신은 윤리적 우주론적인 경향에서 음악을 연구했다. Ikhwān as-Safā'(순결의 형제단)라는 교단에서도 음악을 통해 단원들에게 교단의 기본교리를 익히게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에게 우주의 아름다움과 조화를 인식하게 하고 물질적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낄 수 있도록 영혼의 끈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음악을 종교적이 아닌 과학적으로 연구하려는 경향을 대표하는 사람들로는 알 파라비, 이븐 시나, Ibn Zayla(??∼1048), Safī ad-Dīn al-Urmawī(??∼1294)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음, 음의 간격과 비율, 화음과 불협화음, 장르, 체제, 형태, 박자를 비롯하여 작곡이론과 악기제작 기술 등의 문제들도 다루었다.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그리스측의 저술에 크게 의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을 문자적, 기계적으로 반복한 것이 아니라 아랍 이론가들은 그리스의 음악이론을 자기 시대에 존재, 연주하는 음악에 적합하도록 수정, 개선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저술들은 음악에 관한 글 가운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이 외에 두 가지 부류의 글들이 또 있는데, 그것은 문학적 백과사전적 일화적인 내용의 글과 실제로 음악을 어떻게 연주하는가에 관한 글들이었다. 우선 백과사전적 저술의 경우는 아랍 문학에 관한 글이나 기타 역사, 지리, 종교, 수피즘에 관한 저술 속에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음악은 이야기의 일부, 또는 음악이 도덕적 행동에 주는 영향, 종교적 효용, 혹은 교육과 교양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라는 측면에서만 설명될 뿐이었다. 이것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부 알 파라즈 알 이스파하니의 {키탑 알 아가니}이다.

 
   이것은 음악과 음악생활과 미학에 관한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알 이스파하니는 당시 유행하던 노래를 모으고 그 작곡자와 배경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달았으며, 동시에 상당한 기술적인 내용들도 첨가하였다. 그는 손가락(asābi') 선법이론을 소개하면서 이 이론에 기초해서 만들어진 노래들을 같이 소개하였다. 음악의 실제에 관한 이론을 다룬 책들은 주로 교육적인 목적, 즉 실제로 음악을 만들려는 아마추어나 전문가들에게 필요한 기초지식을 제공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Ahmad al-Kātib의 {음악지식의 완결}>은 음성학, 호흡법, 발음에서부터 시작하여 악기들의 배치, 청중의 반응, 표절, 음성의 분류와 취급 방법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고, 좀더 이론적인 차원에서 그는 현재 사용되는 용어들과 선법에 관련된 문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Tazwīd al-Qur'ān(쿠란을 아름답게 낭송하는 법)도 실제로 연주가 이루어지고 듣는 사람에게 교육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위와 같은 분류에 포함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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